하늘이 무너질까? 아마도 이 질문에 우리 속담에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 무엇을 인지할라 치면 이미 세상이 지나쳐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듯싶다. 본질적인 것들은 비슷하겠지만 상대적으로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정신없게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너무 빨라 보이고 가끔은 그 속도에 자신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세탁조에서 돌아가는 빨래더미를 보면서 상하좌우로 흔들어 대는 세탁조의 변화를 빨대들은 넋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때가 잘 빠질지 모르지만 진정 중요한 옷감이 상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자기의 색깔과 자기의 정신은 이 빠른 세상의 변화속도에서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져갈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비해 나는 너무 나 자신에 정체돼 있어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대성 원리와 상대적인 가치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정말로 무엇이 소중하고 중한지를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질까?"라는 고민을 했던 시기는 아마도 모든 이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기원하고 하늘을 보며 별을 보며 힘을 내고 하늘의 상태에 그 기상상태를 살펴야 나의 생업과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비 맞는 일이 다수였을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땅에 더 익숙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살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차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이동 중에 핸드폰을 보고 또 보고 게임에 대화에 우리는 참 많은 부분을 그 작은 기계 안에서 소화하며 살고 있다. 그가 하늘이고 그가 신앙이고 그가 욕망이 되었다.
그 욕망은 가끔 너무도 은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나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는 '야뉴스'로 월식과 일식을 번갈아 하며 가끔 너무 많은 나의 일상을 빼앗아 가는 말 그대로 악의 축처럼 여겨진다. 눈을 떼면서 보기 시작해서 잠들 때까지 그를 쳐다본다. 이건 신앙도 아니고 내가 만든 나의 신앙이다.
이러다 보니 하늘은 커녕 땅도 안 보일 지경이다. 부딪히고 떨어뜨리고 혹이 손이 발보다 커지는 진화가 발생될까 두렵다. 주먹대장이 되어야 하니 아니 핸드폰 키보드는 잘 쳐야 하니 손가락은 더욱 가늘어지고 손은 커지는 형태로의 인류가 진화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 하늘은 그런 상징성 조차도 없어 보인다. 우리의 하늘은 핸드폰의 화면이 끝나는 스크롤의 끝이 되고 신앙이 되어 버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