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영화를 몇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한 9차례 아님 8차례 항상 보고도 몰랐는데 이제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명확해 졌다.
아마도 1960년대의 홍콩의 영화,
난 아시아가 이렇게 비슷한 문화적 토대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한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아시아라는 나라는 어찌보면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이익과 가치가 우선시 여겨지는 사회라는 편견을 같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삶으로 보면 개인의 욕망을 아니 서툴지라도 무대가 달라지면서 개인에게는 좀 더 가혹하게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던 것이 동양이다. 왜냐하면 오리엔탈은 예의와 도덕 왕중심의 문화로 일찌기 서양이 포기한 그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가장 빛나보이고 화사한 동시에 가장 애틋함과 가슴이 아픈 시절인 것이다. 사실 여기에 국가의 문화와 관습이 끼어들수록 얼마나 억울하고 개인을 억압하고 감정을 행동양식을 제한해왔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표현중에 " '애간장' '애'라는 말과 어찌 보면 통한다." 슬픈 story와 애절한 이야기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 중세까지 유럽도 마녀사냥과 투표권 2개만 봐도 얼마나 여자의 정조와 인권에 대해서 얼마나 차별이 많았나? 미국은 아직도 흑백갈등이 곳곳에 나타나고 여러 범죄와 그 후폭풍이 지금까지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 차별이 천년을 지속을 하는 것 같다.
배우자들의 불륜으로 또다른 불륜이 나온 것이다. 제3의 입장에서 보면 다 그들에게는 love-story인데 말이다. 힘들고 의지할곳이 없을때 단비처럼 또는 비상구처럼 느껴졌을 인연이 시작된것이다. 불륜과 러브스토리는 남들이야기이고 그들에게는 현재의 진심, 찐 감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난 이음악에 이끌려서인지 "국수를 받으러 보온병을 가지고 갈때 그 음악과 그 걸음의 속도 그 주변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워킹을 넘 좋아한다." 절제된 장면들, 묵직한 불륜 영화,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과 카메라가 영화의 배우를 여배우 '장만옥' 소매없는 원피스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여배우가 있을까? 끊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평해 보이는 일상을 그 불편해 보이는 옷으로 그리고 키스씬하나도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수도자의 삶처럼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히려 구도자보다 더 구도자 스럽게 보인다. "배우자의 불륜과는 다를 것 같았다."라는 멘트처럼 인간이 사랑의 범주에 오면 달라질 수가 없는가 보다.
이번 영화를 볼면서 두개의 직관이 든다.
하나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피천득 '인연'과 탕웨이 '헤어질 결심' 두개가 문득 떠올랐다.
피천득의 인연은 논란은 많지만 거기에 나오는 '아사코'라는 한여인에 대해서 평생 3번의 우연이자만 성장과장중에 만남을 이야기 한다. 기억을 소환해 보면 '초등학생 시절' '대학생' '중년' 아사코와의 3번에 걸친 만남과 이별을 추억하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마무리 한다.
평생을 지배하는 국정교과서의 말치고는 파급력이 크다.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을, 내가 춘천 사람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피천득을 싫어하는 이유중 친일 논란이 일어서 인지 몰라도 난 춘천에 가서도 아사코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은 호감이 많이 가는 이유는 우리는 넘 많은 것을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며 사는 삶이 인간이 이기심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애틋한 감정이 "애가 많이 탄다."라는 말로 표현한 우리의 선조들이 대단해 보인다. 왜냐하면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내가 스스로 그 감정을 삵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가시는 그 길에 꽃을 뿌려주는 ..." 현실적이지 않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역설이지만 얼마나 애틋하고 보고 싶었으면 나중에 다 포기하고 너 가는길에 꽃을 뿌려주었을까? 사랑에서 측은지심으로 가는 사람마저도 이해할려고 노력한 흔적이고 미움은 아예없고 그냥 가는 그 현실마저도 철저하게 내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탕웨이 '헤어질 결심' 이다. 헤어질 결심의 탕웨는 바닷가 모래성을 쌓아두고 '썰물'로 삶을 마감해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잘 이해를 못하는 나로서는 보고 또보는 이유가 IQ가 딸려서다. 감독이 또한 작가가 죽음을 가장 dramatic하게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택한 scene 치고는 넘 이국적이고 우리의 정서랑 맞지 않지만 일면 충격적이기도 하다. 흡사 일본인들이 하는 suicide방식처럼 특출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왜 갑자기 이영화가 생각이 난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더니, 이유는 불륜을 바라보는 문화적인 차이 시선 그 이유가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어찌보면 화양연화가 '시대적 이유의 절제'라면 '헤어질 결심'은 내면의 갈등으로 인한 영화로 보여서 인것 같다. 아 택시의 저 장면이 오마쥬의 장면일줄은 아무리 찾아봐도 이 장면은 봤는데 못찾아서 이 장면을 올린다. 아마도 장만옥의 역을 탕웨이가 하는 것으로 나는 정서적인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택시안이 가장 이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장소로 둘만의 장소였던 것이다. 화양연화가 이루어지 못한 사랑이라면 헤어질 결심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상황설정처럼 보여진다. 범죄자와 수사관으로 아예 이 만남은 시대적 문화적 편견인 유부남 유부녀의 이야기에 한켠 넘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와 형사의 관계로 문화적 범위와 법률적 범위로 확대 돼었지만 인간의 감정은 어디에든 끼어 들어가 그관계를 사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양조위가 굳고 침묵의 행동가로 사랑을 지켜가는 중심이라면 오히려 범죄자이면서 그 역할을 탕웨이가 하는 것이다. 언어도 서투른 사람이 그 이질감이 몰려오는 것이 그 영화의 매력인 것이다.
세번째는 내내 이영화의 '벽'이라는 장소가 특별해 보였다. 내가 벽을 많이 보아서 일까?
영화내내 등장하는 계단과 벽, 앙코르 와트 의미를 만들자면 말이다. 아마도 감독이 그런 느낌을 줄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비가오나 맑으나 이들이 항상 만나는 집앞 공터의 벽, 앙코르와트의 벽 나의 벽을 생각나게 한다. 영화는 참 많은 상상을 하게 해준다. 난 그게 넘 좋다. 양조위가 1962년 생이고 왕가위 감독이 58년생인데 영화는 '시대적 유감'을 이야기 하는데 이렇게 고급스럽게 애정영화로 만들어 버린 감독의 스케일이 대단하다. 중국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첨밀밀'도 그렇고 역시 아시아 문화는 어느정도 사랑의 경험도 힘든 경험을 개인이 받아 들이려는 경향이 보인다. 사회문화적인 어려운 경험들을 개인의 사랑으로 만들어 버린 non-social해보이지 않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드이는 서양의 그것들과는 다른 힘든 사회적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자세 말이다.
불륜을 이렇게 담백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이 대단하다. 난 이영화는 대단히 선이 두터워 보인다. 감정을 대하는 선들이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다. 두터은 폰트 50-60의 서체로 양조위와 장만옥의 중년의 풋풋함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불륜과 그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과 그 필연이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삶에 대해 너무나 신중하게 잘 표현돼어져 있다. 보면 볼수록 우리 김소월시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넘 유사하다.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볼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감정선이 매번 틀려지고 안보이던게 보이고 난 이영화를 볼때마다 내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봄 가을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립을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어제는 장만옥이 안돼 보였다. 이 여자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이제야 그 감정선이 보였다. 편집증적인 장면들이 그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는 죽도록 사랑했던 기억들과 죽도록 집착하는 요즘의 세태들이 대비 되어진다. 핸드폰도 없이 오로지 tele-phone하나에 memo에 모든 감정들을 전달했던 때에 비하면 표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표현이 깊어지고 더 성숙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임을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한다. 다음엔 이영화를 sound를 빼고 자막으로만 한번더 봐야 겠다.
탕웨이가 바닷가 모래사장을 쌓아두고 밀물에 몸을 맡겨 삶을 마감하는 것처럼 한여자는 생을 선택해 아이와 그 추억의 공간에 기다리며 사는 것이고 한 여인은 아예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삶을 뛰어넘은 것이라 해야지 더 맞는 표현일 수 있다. 두여자 모두 거친 운명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인데 둘다 안타까운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만약 유럽이라면 북유럽이라면 저렇게 죽지 않아도 돼는데 우리가 드라마가 왕성하는 이유일까? 할 이야기들이 넘 많은 민족 그 민족은 아픔이 많은 것이다. 아뻐서 할 이야기도 많고 애절하고 힘든 것이다. 그 부담이 모두 개인의 몫이어서 넘 쓰라리게 생각돼어 지는 것이다.
'이별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파할까봐 미리 미리 경험하는 그 장면을 보면 이별연습은 오히려 더 그 상황을 어렵게 하는 것 같다. "좋은 와인뚜껑이 저렴한 와인뚜껑보다 행복하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누가 더 행복하고 불행한지 보다는 그 실체에 얼마나 다가갔는지가 중요해 보인다. 감정의 몰입은 넘 힘들지만 "LOVE IS FREE"라는 이 서양의 엄청난 PARADOX가 있는 것 보면 사실은 동서양도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FREE IS LOVE 아 이정도가 될려면 우린 얼마나 더 상처받고 더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것일까? 저 앙코르 와트 벽에다 뭐라고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내가 사는 삶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더 사람처럼 진지하고 성숙하게 나의 모든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내 삶에 대해서...
최소한 나만이 지켰던 내 인생의 가치
내가 생각하는 신념 유연함, 그 사랑들이 어떤 모습을 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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