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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사진

by 링마이벨 202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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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모지? 사진은 완전히 현실이 된 듯하다. 현실이라 생각을 한다. 최소한 이사진을 보는 즉시 사진에는 두 가지 모순된 특징을 모순된 특징 현실과 모순된다는 말인가? 객관적 현실이라 함은 현실을 객관화하는 것인지 객관홛된 현실을 이야기 하는지 잠 오르겠자. 하나로 묶어 준다는 장정이 있었다 사진은 애초부터 객관적이라는 것을 누구다 인정하는 그런 특정한 시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기록을 하는 기계였기 때문에, 그런데 현실에서는 기계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현실의 기록이고 거기에 기계적 창조물외에 정서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사진은 현실의 기록 아무리 부분적일지라도, 말로 된 설명과는 달리 이 점에는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사진은 현실을 증명해 준다 사진에 찍힌 누 군가는 틀림없이 그곳에 존재했던 인물인 것이다 사진은 "논쟁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잡한 진슬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진은 ‘그저’ 그 무엇일 뿐인 것이 아니며, 울프나 그밖에 어떤 사람일지라도사진 을 일종의 사실로 여길 수는 없다 "눈 은 뇌와, 뇌는 신경 체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신경 체계는 과거 의 경험과 현재의 느낌을 모두 통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낸다" 고할 수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빠른 재주를 갖춘 덕택에 사진 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 에 그 현실에 판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이 의도돼고 조작돼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에서 아무리 metaphor로 문학적인 비유를 하지만 사실은 한장의 사실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만약에 베트남 전쟁 이전에 많은 사진들이 순간적인 reality에 기반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상황에 다시 재 정리 된것이라면 후세에 얼마나 많은 후회와 사진에 대한 감동이 떨어질까? 진실과 구성에 대한 평가는 상이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지금 신문에 들어가 있는 사진은 어떤 역사적 가치와 감동  reality를 대변할 수 있을까? 

 

 

전쟁의 참혹함 전쟁의 비인간적 묘사 

 

 

사진의 힘이란 바로 진실의 힘이라는 것이다. 진실을 강요하는 그 힘, 자꾸 진실을 믿게 하는 그 잘못된 힘 말이다. 진실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사진이 가진 한시성과 순간이라는 진실 그리고 그 now의 힘말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사진을 믿고 의지하는 그 힘인 것이다. 황폐함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그것이 희망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추후 이런일이 되풀이 돼지 않기 위해서 일까? 라는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전혀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지불식간에 찍었다는 이미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경우 ,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이 사진을 찍은 의도가 개인의 영달이든지 간에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바짝 들여대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진이 소비자들의 행동을 조작하는데 멋지게 사용되는 멋지게 사용되는 세계에서라면 슬픔ㅇ로 가득찬 장면이 뭔가 효력을 가지게 될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당연시 될수도 없다. 충격이란 점점 엷어 지는 것이다. 

충격이란 점점 엷어지고 하지남 사진이 자아내는 친숙함은 사진의 감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토템기능을 한다. 수천마디 말보다 한장의 사진이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를 더욱더 구체화 하는 것이다. 사진은 감각을 구성하는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사진으로 그 사건을 정서화 시켜 구체화 시킨다. 이러한 방식을 기억하기 memorial이라고 하는데 결국에 가서는 허구가 되지만 정확히 다시 말하면 집단적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개별적 기억과 개개인의 상상과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획일화 되는 기억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싸한 관념의 일부로 허상인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은 일방적이지 않지만 그 사건으로 보여지는 교훈은 동일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모든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주그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과거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사람들과 대부분의 그리고 그 기억을 존재하기 위해서 일종의 약속인 것이다. 기억의 편의성이라고나 할까 사진은 이러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정신속에 꼭꼭 숨겨두어 뭔가를 구체화하고 꼬옥 간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가 있는지에 대해 나는 사진의 편의성이라는 항목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이 달나라 사진, 백악관 성조기 사진, 태극기 사진 이만큼 정치적이고 이데올르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 있을까?   사진의 속성은 잔인한 폭군의 성격을 닮아 있다. 그래서 전쟁을 선호하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은 그잔인함을 보고싶어한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욕망중에 하나다. 그러한 것을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Edmund birke는 사람들은 잔악한 광경을 담은 사진을 보고 듣고싶어한다. 

 

 

이 사진을 보면서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군중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단순한 고통 그 이상으로 보여지는 이유는 타인의 고통에서 결국 고통이상의 무언가 보여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흐생에 ,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종교에서 말하는 티벳에서 일어나는 오체수양에 대한 긍정적인 수양이 있는것에 비해 고통은 뭔가 애초에 잘못된 것, 불의스럽거나, 일본의 범죄로 여겨지는 고통은 거부하고 고쳐햐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그저 낯선 개념인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한 다른사람들의 고통에 무감각 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변의 무관심과 무책임에 그토록 관용을 베풀었던 이유는 나스스로 현상황에 어쩔수 없는 무력감이 지배하게 되면 주위의 무관심과 무도덕에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잔인한 이미지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잔인한 이미지 형사들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고통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이 잔인해 지는 것이다.  

이미지가 주목하는 것들을 대중들도 주목한다는 방식이다. 사진에 찍혀야만 현실적이 되는 언론인들이 주목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와 어떤 갈등을 평가하게 되는가에 사진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미지로 뒤덮 세상에서 우리하게 중효할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인가의 영향력이 점점 떨어져 나간다는 방식이다. 완전히 무감각해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양심을 콕콕 찔러대는 이미지는 뭔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서 서서히 빼았어 간다는 것이다. 

사진에 자주 찍히다 보면 결국 점점 현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건보다 사진으로 찍혀 보여진 사건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동정심을 많이 영향을 줄 수록 그런사진은 점점 더 연민 자체를 사그라지게 만든다. 사진이 주는 충격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모두 방관자로 만들어 버린다. tv위주의 이미지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곧 싫증나도록 만들기 때문에 텔레비젼의 나오는 이미지는 사람들을 무감각 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미지 자체가 흘러넘치고 상대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하고, 끊임없이 채널을 돌리도록 만들고 따분해지며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매일 국가적 사고가 빈번하고 획일적인 직업과 급속한 정보전달은 정신의 분별력이 무뎌질뿐만 아니라 정신이 미개할 만큼 무감각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매일 넘쳐나는 뉴스에 공중파, 종편, 유투브, 페이스북, 트위터 사면초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잠깐 눈만 돌리면 수많은 참사와 잔악행위, 살인, 약탈, 총기사고 여러 사건을 듣고 보게 되는 것이다. 연민이 극에 달하면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래서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사진에 관해서 이미지의 무차별 확산으로 우리의 능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다름아닌 현실감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로 보고있고 몇몇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보편화하는 셈이다. 결국 모든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방식이다. 

잔혹학 이를데 없는 이미지들이 늘 우리를 따라 붙는 것이다. 제아무리 이름뿐일지라도 인간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을 상기하라고 절대잊지말라고 사람들에게 기억자체에 많은 부여를 하는 듯하다. 사색이 가져다주는 것 보다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기의 발전과 더불어 예전보다 세계의 재앙 소식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이런 소식들은 널리 퍼지고 만약 특정한 고통에는 특정한 구경꾼들이 따라붙고 특정한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원래부터 더 흥미로기도 하다. 

 

 

왜 이들이 전쟁사진과 참혹함 이런 이미지에 탐닉하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것 같습니다. 


병사들은 놀랄 만큼 살아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말이다 그렇지만 왜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해야 하는 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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