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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동성애

by 링마이벨 2020.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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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영화가 한국에 들어온것은 93년이라고 했는데 내가 학교 졸업을 앞둔 그해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무삭제로 다 노출이 됐다는 영화로 이해된다. 왜 우리는 무삭제 영화에 약할까? 호기심이 발동을 해서인지 이 영화는 그 당시 상당히 화제성이 대단했던 영화로 이해된다. 이 영화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바로 이러한 동성애를 다룬영화로 첫번째 두번째 해당하는 영화로 인식된다. 지금까지도 나의 성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것은 아직도 크게 나아지지를 못했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아주 단편적이고 아주 얇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사실 깊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 생각을 오래 했다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으로 오해될 수 있었던 소지가 있었다. 

우리의 생물학적 남녀를 결정짓는 성결정 유전자는 어디에서  우리의 세포에서 유래하며 각 남녀를 구분하고 결정짓는다. 남녀를 결정짓는 일은 오히려 생명의 신비로 여겨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이 영화처럼 내가 복학후 엄청난 화제와 염문을 뿌린 영화는 없을 듯하다. 우리는 모두 이영화의 포스터 그리고 샤론스톤이라는 걸죽한 배우를 만나게 된다. 얼음송곳으로 살인을 하는 psycho의 이야기 이스토리는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했던 영화로 기억된다. 여기에서 샤론스톤은 아마도 남성과 여성을 사랑하는 양성론자로 그려진다. 사실은 그당시에는 그 부분이 이해가 너무 돼지 않았다. 실제로 그러한 성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지 실제로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지난일이지만 말이다. 참으로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얼마나 머리가 복잡했던지! 이런류의 영화는 찜찜하기도 하지만 개운하지도 않았다. 여러가지 실제로 이런일이 있는지에 더더욱 생각하지 않고 극장을 나섰다. 

아 머리아프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이러한 성적인 성향이 요즘처럼 회자된 적이 있을까? COVID-19이후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처럼 그렇게 머리아픈 일이 있을까? 

 

누른다고 누를 수 있나? 억제한다고 억제 할 수가 있나? 우리의 생활에 음성적으로 아니면 크게 드러내지 않고 이러한 시설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시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매도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성적 편향성에 대해서 도덕적인 잣대와 도덕적인 기준 생물학적인 기준등이나 그 외 여러가지들을 rationale를 기본원칙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고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내 주위에 가족중에 Someone있다고 하면 문제는 틀려진다. 이제는 뜬구름 잡는 주위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가족의 일이 돼버리는 것이다. 만약 그때도 외부적인 일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만약 연예인라면 가쉽으로 셀럽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만약 내 이웃이 내가 아는 친한 지인이라면 내 가족이라면 이러한 것으로 접근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주 심각해지고 머리가아파올 수도있다. 

우리는 소수자라는 표현을 쓴다. minority라는 단어로 대치시킨다. 소수자 가끔은 레즈비언으로 호모로 그리고는 소수자는 바로 앞에 성 소수자라는 표현으로 대치돼 표현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러한 성향이 생물학적 원인인지 아니면 성에대한 억압과 종교가 설정해 놓은 진리라는 부분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인지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실에 기인하던 소수자라는 표현은 억압과 편향성으로 생겨난 원인에서 기인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강요한 교리와 성서에서 규정한 아담과 이브의 선악의 열매를 먹은후 하지만 중세 수도원에서 너무나 횡횡하던 동성애의 빈번함은 오히려 세속과 문닫고 생활한 사람들의 그러한 폐쇄된 삶에 대해서 일어난 여러가지억압에 대한 반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생물학적으로 이끌린다면 감정적으로 사랑을 느낀다면 동성애에 대해서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그러한 동성애의 강렬한 욕구가 그 욕구로 만약에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떠할지는 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상당히 본능에 충실히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본능이란 실제로는 우리가 양심이라는 부분으로 대치할 수 있는 정직함이 내재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감정에 그러한 감정의 표현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표현해야 하는 입장에서 ... 사실은 이글을 쓰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표현에 대해 거북한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거북스러움은 자연스러운 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부분 인정해야하는 입장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고 인정해야하는 그 본질적인 수긍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또한 어디로 갈건지 알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다. 그 솔직함은 바로 내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쁠 수 있을까? 나쁜 것인가?의 문제는 차선의 문제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써야 할것 같다. 애초에 쓸려고 하는 방향과 아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에 대해 집중하고 아무 생각없이 쓸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뻘쭘하고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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