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기억의 자살

링마이벨 2018. 11. 2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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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자살


이인원



지금 발등으로 툭,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를 잡히지 않았다면

눈꺼풀 아래 영영 매장됐을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순장(旬葬)된 인물

우리 모두의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의 순간


경우에 따라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미 오래전 자살한

기억의 무덤에 누가 삽을 댔던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만 남긴 채 요절한 사람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순장했던 이를 아니 순장당했던 젊은 나를 발굴해보자

꽁꽁 암매장했던

그리움 또는 증오라는 이름의 녹슨 부장품(副葬品)이라도 도굴해보자


봉긋한 기억의 봉분이

도툼한 분홍 입술의 시간이 자꾸 달싹거리는 날은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또 가면 어이하리야


*서정주 시에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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