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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broken

Fury

by 링마이벨 202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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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에 분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아침안개처럼 강변에서 마을로 밀려오는가? 아마 강촌으로 MT갔을때 새벽에 짙게 드리워진 새벽안개를 본적이 있다. 아침에 급히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노젓어 배로 강을 건너올때 스틱스강가를 건너는 지옥의 사자처럼 분노는 새벽안개처럼 밀려온다. 태양이 떠오르면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아지랑이처럼 

분노는 마치 비개와 같다. 체내 축척되는 지방과 같다. Intake만 있는 소화돼지 않고 오로지 쌓이면 자체가 소멸될때까지 생명을 공유하게 된다. 분노는 갈등과 폭력을 먹고사는 거머리 같다. 분노는 왜 이렇게 만연돼 있을까? 분노는 사회적 문화적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유난히 부정과 수뢰가 만연해 있는 문화는 더욱더 분노가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 술 소비량이 많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촌지가 있다면 정식적인 팀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식당에서 밥 먹을때 만원하나 주지 못하면 불편하고 골프장에서 캐디에게 만원줄 수 없을때 불편하다면 그러한 불편함을 당신이 느꼈다면 오죽하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촌지 주는 것을 법으로 막고 있지 않겠는가? 돈은 주는 이유는 fast track개념일것이다. 급행료 좀주고 처리할 수 있다면 얻는 이익이 더 크면 클수록 촌지는 경험의 소산인것이다. 사시생에 대해서 수십년 장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대기업이 언론사가 검찰에 돈을 대서 해외 유학비를 주고 정치가의 자녀를 무료로 해외유학을 담당케 해주고 어디에든 돈이 개입이 된다. 자본은 철저하게 그 사이사이 빈 공간을 촘촘히 아마도 수십년을 이렇게 반복해 왔던 것이다. 그 소산이 바로 문화로 대치돼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의 축척된 비만이라는 결과이다. 비만은 지속해서 비만을 낳아왔던 것이다. 사실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에 가장 기본이 돼는 Base는 정의, 공평함 보다는 정의와 공평함을 실천할 수 있는 분위기인것이다. 그러한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리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혹 소수에 대해서 느끼는 우리의 부정과 부패가 그러한 부정부패지수가 만연하다면 우리의 분노는 개인의 원인에서 오는 분노자체보다는 사회적 영향력이 변수가 상당히 작용을 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지도에서 보는 빨간색 부분이 부정부패의 부패지수가 심한지역인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등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아직도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는 것이다. 만약 국가전반적인 사회의 부패가 만연해있다보니 개인간 인간관계, 가치관, 자존감은 더욱더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돈, 빽, 줄이 우리의 공기와 같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자녀의 삶은 중국이 부정부패에 대하여 공개사형을 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해 보인다. 지금도 맬 신문을 채우는 부정, 부패와 검찰 정치인들의 뉴스는 사실 국민을 맥 빠지게 만든지 한해 두해가 아니고 개인도 그 문화적인 테두리안에서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개 우리는 디지털문화로 2단계 내지 3단계로 아는 사람의 아는사람 그 아는사람으로 다 통하는 아주 촘촘한 인간관계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또한 그 촘촘한 네트워킹에서 예외는 아닌것 같다. 우리는 그 삶에 울타리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끔 경제관계를 이야기 할때 우리는 넘 깨끛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 표현을 가끔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우를 범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조국장관의 예는 철저히 그러한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 상처를 준 부분인데 사회적으로 보면 이런스펙은 사실 누구개인의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할 수없는 엄청난 사회적 관계작업의 소산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고 같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이름만 들어도 알 수있는 큰 대학병원 근처에 양주가게들이 있는지 왜 대학병원 수술과 진찰을 받으려면 몇달이 또는 해를 넘어가는지는 실제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아직도 미지수다. 만약 이 분노를 사회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한다면 사실 원인 제공자이면서 책임을 무책임하게 피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법을 이용해서 거대한 돈을 벌고 법은 오로시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자기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쓰는 것, 정치가가 최고의 자리에서 자기가 누리는 모든 정보와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일삼고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총을쏘고 대통령이 알 수도 없는 수많은 곳에서 자기의 주머니를 채우고 지 국민을 몇백명씩 죽여도 골프치며 유유히 살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이땅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일제 강정기 축첩된 재산으로 대기업의 반열에 오르고 아들딸은 호의 호식으로 살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나는 이땅에 살고있다. 내 아들과 내 부모가 내가족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지만 이러한 분위기, 대체적으로 모난돌이 정 맞는다.라고 이야기하는 나라 대충 이렇게 저렇게 사는거지! 나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자식도 그렇게 대충 대충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참 잘 만든 말이긴 하다. 이 말을 누가 했을지는 추측을 할 수있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의 분노는  우리가 발전하는 원동력인것이다. 미치도록 댓글을 달지만 그 댓글은 신문사의 광고비를 오히려 증가시키고 우리가 철저하게 가족의 안위 가족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가 심각하게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completely~~ 가족의 안위만을 가족을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니 결국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없다보니 가족도 없어지는 희안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도 아니면 우리는 누구를 어떤 대상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결국 남을 믿지 못하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분노마저도 분노까지도 이득을 보는 놈들이 있는 것이다. 분노를 이용하고 조장하고 거기서 또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그렇고 정치가 그렇고 이러한 대다수의 분위기를 만들고 여기에서 수수료를 떼어가는 것이다. 국민들은 서로 싸우게 하고 광화문에서 여론을 수렴한다는 미명하에 디지털공간에서 아주 냉정하게 생각하는 한해가 돼기를 바란다. 더이상의 돼지의 이익은 참을 수 없다.  우리의 디지털 공간이 너무 편파적으로 변하는 것, 우리의 취미가 일상이 없고 아이들은 모두 공부하는 벌레처럼 독서실에서 도서관에서 까페에서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게돼고 아버지는 맬 직장만을 생각하고 꿈도 미래도 없이 올인하게 만든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우리가 다양성 없이 맛집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다양성 없이 왜냐하면 맛이라는 부분은 개인의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맛도 대중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돼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에 대한 결정을 할때 내가 먹어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내 개인의 경험을 다수의 경험으로 대치한 것일까? 왜냐하면 개인의 취사선택을 다루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개인의 신분고하에 따라서 불평등이 어디에든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미래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한발씩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미래로의 한발 한발 한발 우리는 그리고 나아가고 있는데 이자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발한발 나아가지만 전혀 움직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사람들이 많다면 앞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기는 더욱더 어려울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이런일 저런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돼는 것이다. 경우의 수 많은 경험을 하고나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어나는 일, 그 경우의 수에 설득당하게 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경우의 수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실천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삶이라고 이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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