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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broken

by 링마이벨 202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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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에 우리는 돌과 동물뼈, 희귀한 모든 것들은 물물교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물물교환의 범위가 엄청났을 것이다. 바닷가가 있는 집은 물고기일것이고 쌀과 겨란 동물의 가죽 나무 돌 모든것들이 교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EXCHANGE 인류가 발명ㅎ낸 최고의 가치다. 교환이란 서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주고 받는 것이다. Give and Take 이건 인류가 가져다 준 최고의 정신적 가치인것이다. 이 교환은 우리의 문화라는 것을 파생시킬 수 있었다. 문화는 어찌보면 사생아로 시작해 안방마님의 자리를 잡은 것일 수도 있다. 문화는 어찌보면 하나의 고급화 과정일 수도있다. 고급화란 어찌보면 시간의 과정일 수도 있지만 단순화하고는 거리가 또 있다. 단순화는 어찌보면 가장 거짓이 없는 본질에 다가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의식주도 단순화 과정이 있었을때는 Sourcing이 없었을 것이고 먹다보고 저장하다 보니 Sourcing과 보관으로 오래 먹어야 하다보니 방부의 개념과 냉장의 기술이 들어온 것이다. 의복이라는 것도 아마도 처음에는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가렸을 것이고 수치심이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이 장식으로 치장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본질은 가치의 교환과 기대가치가 상승하고 점점 더 편리한 교화가치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무언가는 그 물건을 대신할 가치교환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동물가죽과 고기를 대신할 돌을 대신할 그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무언가는 애초에 동물가죽과 고기 쌀 등 애초에 제한된 물건의 교환가치로 사용돼었을 것이고 아마도 쓰다보니 그 편리함에 아마도 모든것을 다 살 수 있는 용도로 확장돼었을 것이다. 쓰임새도 확장돼고 확장돼면서 그 본연의 동물가죽보다 쌀보다 희귀한 돌보다 대신의 가치가 더 가치가 있어지는 결과로 변모하게 돼었다. 금보다 교화가치가 더욱더 가치있게 여겨지고 교환가치가 본연의 가치를 압도하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때 본연의 삶이 중요한데 가끔 삶보다도 중요시 돼는것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삶의 보존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가끔 잊고 살아가게 된다. time이라는 것 우리주의에 있는 모든것은 그 본질, 그 본연의 가치를 희석시키게 하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삶을 마비시켜버려 인식하지 못하게 하니 시간은 속도중심으로 변화해간다. 속도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람을 못보게 하고 나를 못보게 하고 주위를 볼 수 없게한다. 결국 보지 못하다 보니 끊임없이 말잔등에서 떨어지게 돼었고 방향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정지된 차에 앉아있을때 옆에서 후진하는 차를 보게 돼면 내가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속도가 양옆으로 너무 빠르면 내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내 차가 어느차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그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뿐... 

이렇게 생각을 해볼까? 만약 이 물통에 물이 없다면 이앤 물통인가? 물통일뿐 물통이 아닌 것이다. 그저 플라스틱인것이다. 석유화합물로 만든 그저 껍데기일뿐 채울려고 사는 삶 이 물통을 먹을만큼의 물만 있다면 먹을만큼의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내 몸 내 목을 축일 수 있는 만큼의 물을 마시고 나면 남은 물통의 물은 물인가? 번거로와야 하는데 왜 저 큰 물통에 물을 채울려고 하는지 왜 오늘도 우리는 계속 채우는 동작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도 말이지만 나는 결국 내 삶ㅇ을 채우려는 모습보다 물을 길어 물통에 물을 붓는 동작만을 지속하다보니 몸만 빠쁘게 움직이는것인 것이다. 결국 지속하다 보니 나는 반복적인 행동에 익숙해져 몸만 바삐 움직이는것에 익숙해져 가고 더욱더 머리는 쓰지를 않게 돼는 진정함을 추구하지 않고 손과발이 바쁜것에 탐닉하게 돼었다. 결국 손만 놀리다가 삶에 closing을 찍게 돼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깨달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탐욕은 어디에서 오나? 공즉시색이 먼저인가? 아니면 색즉시공이 먼저인가? 불판에서 저 닭갈비가 사라지면 내 배는 나올 것이고 내배가 들어가면 닭갈비 불판에 닭갈비가 수북히 쌓여있을 것이다. 빈 불판을 대할때 공허할 수도 있지만 저 빈 불판이 데워지고 닭갈비가 익어가면 나는 침을 흘리고 나는 내 배를 두둑히 채울것이다. 그러면 내배와 닭갈비 불판은 공생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인가? 만약 불판이 아니고 내가 모으는 돈은 내 주린 배을 위함인가 아니면 내 허영 내 뇌의 편집적인 집착과 그 개더링의 소산인가? 내 뇌의 편집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나로 말미암아 벌어지고 나로 말미암음이다. 내가 불판ㅇ 닭갈비를 비우는것에 탐닉하게 되면 내 배는 불어날 것이고 결국 시꺼멓게 탄 나의 폐허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 폐허는 자명한 것이다. 지속적으로 개더링하게 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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