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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by 링마이벨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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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낳고 많이 죽어가는 나라 대한민국 

청소년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청소년이 미래를 버린 나라 대한민국 

아이들은 학원에서 빛도 못 보고 12년을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나와서 고른 대학은 다시 병원으로 의사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미래의 목표도 하나 아버지는 아파트 가족은 돈 돈 돈 하다가 국가는 백년지대계도 없고 오로지 하나의 거대한 목표인 자본의 신앙화 

학교는 작은 직장으로 변한지 오래고 서점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책들로 가득하고 

아이를 땅한번 밟아보지 못한 채로 차에서 건물로 건물에서 차로 

무한경쟁시대 

친구도 경쟁자이고 가족도 경쟁자이고 모든 콘텐츠는 이러한 삶의 경쟁자로서 모든 이를 디파인한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보니 콘텐츠는 다양해지고 왜냐하면 콘텐츠는 그러한 갈등이 많은 나라에서 모든 삶을 경쟁으로 보는 경쟁관점에서 가족도 망가지고 하물며 국가가 무슨 소용이랴! 

아마도 이장면이다. 노인네가 손녀와 사는 게 김상헌이 뱃사공을 죽인 이유가 다음에는 오랑캐를 안내해 줄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우리네 백성 특히 국가와 국가 경계에 사는 한 노인장이 국가보다는 가족의 안위와 가족의 안녕이 삶을 살아가는 일순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도 백성을 care 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은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스스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신념도 이데올로기도 사실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이 그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이 백성에게 강요한 하나의 독트린일 뿐 백성에게는 어떤 의미도 심지어는 그들에게 생존할 한 톨의 식량만도 못한 역할을 한 것을 국민이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에서 보면 이 국가는 청소년에게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양산했을 뿐 누구 하나 삶의 의미와 삶의 방향 목표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는 모든 입시가 끝나면 대학이 그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기성세대에게 지친 청소년들이 결국은 나이가 들어 그들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news는 좌우 논리로 가득하고 심지어 뭐가 옳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도 않는다. 맬 테이블 양쪽에 두 사람을 앉히고 지가 옳다고 이야기하면 신문은 방송은 앵무새처럼 이야기하고 어떤 방향성도 없이 서로 싸우게 하고 심지어 문 닫을 때까지 싸우게 하고 문을 닫아 버린다. 결국 백성의 자존감과 그들의 이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광화문은 맬 태극기가 펄럭이고 거짓은 너무 흔한데 거짓을 벌하는 이도 없다. 거짓도 자꾸 이야기하고 자꾸 듣다 보면 진실이 되고 백성은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고 이득이 되면 진실이 되는 'Capitalized thinking'로 판단한다. 누가 됐든 무슨 일이던 상관없다. 나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해를 가져다주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내 아이들이 이러한 사회적 양극화는 사물실로 직장으로 대학으로 공동체로 너무 잘 스며들었다. 이러한 획일화는 바로 사회적 극단으로 치닫는 문화현상과 병폐를 낳았다. 

왜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식당을 가도 맛집, 서연고, 서성한 의사 우리의 다양성은 왜 현실에서는 날개를 필 수 없을까? 왜 거대한 무리만이 중요해지는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인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다른 것을 표현했을 때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된 것같다. 유난히 전쟁이 많았고 그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고 정권은 바꾸면 돼지만 실제로 피해를 보고 많은 죽임을 당한 것은 못난 국민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이미 가마를 타고 두만강으로 대통령은 한강을 폭파하고 퇴로로 살길을 찾아 국토의 끝으로 피난을 가고 강정기에는 해외에서 획일화는 사실 정복자의 논리였던 것이다. 못난 위정자들이 그 틈을 노리고 부와 권력을 탐했을 때 그런 획일화를 벗어날 때 철저한 응징과 죽음을 맞이했던 것은 바로 백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통치를 위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쩔 수 없는 통치 방식은 아마도 획일화였기 때문이다. 예외는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빨간 직사각형은 아직도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2023년 '빨갱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것이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이 단순한 색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얼마나 많이 이용했나? 이제는 빨간색이 닳을 만도 헌데... 획일화는 바로 이러한 생활속까지 파고들어 우리의 사고자체를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정치적 의도에 맞게 국민을 편가르고 불편하게 생활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색깔로 죽었으며 이 색깔로 얼마나 많은 선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사회에서 피해를 받고 대를 지나면서도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 역사를 통해 아니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 국가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이 이데올로기의 감옥에 들어서면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게에 주목한다. 이지게는 물건을 나르는 도구치 고는 작은 골목길과 산 협소함에서 엄청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먹고살기 힘들 때 저 지게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한 땔감으로 평상시는 짐을 나르는 편의 도구로 먹고살기 힘들 때는 부모를 내다 버린 도구로 이용됐다. 우리가 진정으로 먹고살기 힘들 때 저 지게로 우리는 인륜을 버리고 오로시 살기 위해 최악의 결정을 하였던 비정한 도구로 쓰이기도 했던 것이다. 2023년 우리는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 힘들 결정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만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정하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서 다시 그 어려운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 국가가 먹고살기 위해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와 좌우만 존재한다. 

이들에게 좌우가 있었던가? 아직도 정리돼지 않은 채로 책임자는 벌도 안 맞고 풀려나서 훈장을 받고 정치에 바로 복귀하고 이건 좌우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고 자기 국민이라면 내 백성이라면 이러한 처참한 일을 당해도 국가가 정리하지 않는 것은 아니 단죄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말인가? 

아이들은 내 살길은 내가 터득하고 내가 해야한다.라는 삶의 태도를 가져간다. 엄마가 주었던 모든 이들이 경쟁자들이고 나는 혼자가 내 옆에 친구도 모두 경쟁자니 내가 힘들어도 손 내밀수도 없고 우리의 드라마 'sky캐슬'이 주는 편협함은 아마도 이러한 획일화를 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기 때문에 내가 이 드라마를 아직도 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는 믿음과 오히려 더욱더 단단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sky가 아니면 삶의 의미도 없고 심지어 정당한 노력보다는 엄마, 아빠의 찬스라는 부분을 더 과장시키면서 부정적 시너지를 확대시켰다고 나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의 고정관념과 영역 목적들을 아주 획일화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다 옳은 것처럼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온몸으로 그것이 준 부정적 인식에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삶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지니지 못한 채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의 삶의 그러한 부정적 인식과 사고를 심어주었던 것은 획일적 사고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교육이 문제인가? 아니다. 나는 학교의 교육은 일부분이고 그사회를 지탱시키는 힘이 부정과 부패라면 당연히 그 사회의 교육제도는 의미조차 없다. 그러면 대학이 그 교육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직장은 그렇게 학교를 나온 사람이 있는 곳이 대학이고 그게 사회라면 사실은 가장부패한 곳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일 것이다. 그러면 좋은 정치인을 뽑을 안목이 우리에게는 있을까? 맬 정치를 욕하지만 선거는 다시 도루묵이다. 선거는 그냥 아파트 값 잘 유지하고 세금 적게 걷고 기업인 자유로운 기업활동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지국민을 위해서 a4 한 장 가득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지 백성의 대한 사랑 없이 오로지 그냥 지나간다. 잘 뽑아야 하는데 잘 뽑을 선구안도 그리고 냉정함도 없다. 오로지 내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선거를 하다 보니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범죄집단이나 다름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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