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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나이

by 링마이벨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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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무 잎이 나고 지고 쉬고
물이 계속 흐르다 바다로 합쳐지는 것
버스에서 내리는 것
ktx도착정보와 함께 내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느낌
비오는 소낙비에 우산도 없고 옷은 너무 얇지만 밖으로 나가야 하는 느낌
우연히 본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이렇듯 자유롭고 유연함이 느껴진다. 
우리의 나이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나이를 보고 멋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함은 아마도 모든 인류의 보편타당한 편견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삶에 곳곳에 묻어나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오히려 난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이테가 생기는 원인은 형성층의 세포분열이라고 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근데, 나이테를 보려면 꼭 나무를 잘라야지만 볼 수 있는가? 난 오히려 이게 더 궁금하다. 나이테를 보려면 꼭 나무를 베어야 하는지 말이다. 우리의 나이는 존중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전쟁의 영향인지 평화시에는 한정된 직장으로 인함인지 나이가 그렇게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해 보인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라는 말이 있다. 나이에서 오는 경험과 배움이 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유달리 나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 하는 문화는 내가 볼 때 '가족'의 개념이다. 우리가 삶을 지탱하는 이유는 바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아마도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민족이지만 이 울타리의 영역은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여타 다른 민족 다른 문화에서 보다도 더욱 폐쇄적으로 생각하는 특성 탓이 아닐까? 
우리나라 정부인사를 청문회 과정에서 보면 왜 이들은 저렇게 많은 돈을 자식과 형제들의 부정부패는 끝이 안보일 정도로 법이 무색할 정도로 보인다. 해도 해도 아무리 파도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부패를 방조한 사람들과 옆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조만간 그러한 부정부패의  대기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늙은 말'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는 바로 정치와 그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훼손하고 다 망쳐서 결국에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어른으로 소임을 다하거나 잘 살아온 사람들의 평판까지도 모두 훼손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바른 나이에 대한 규정은 무얼까?
대인과 소인은 어떻게 구분이 돼는지 신생아~6세까지를 소인이라고 규정하는데 만 나이 이은 지 윤석열나이인지 보통의 나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야간에는 대인과 소인모두 1000 원 추가하는 이유는 아마도 찜질방 야간할증이 도입이 돼서 일 것이다. 그런데 몸이 큰 소인은 몸이 작은 대인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대인은 물을 많이 쓰나? 
대인은 낮에 물을 3천원 더 쓰는 기준이 뭐지? 
대인은 드라기로 엉덩이 말리고 선풍기 더 많이 쓰고 더 오래 체류해서 인가? 
이건 그렇다 치고 평생 돈 많이 쓰다가 나이 들어서 더 욕을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잇값을 못해서 일 것이다. 일전에 이야기한 돈가 진 소수와 권력층이 다 써버린 면죄부와 그들이 악착같이 돈을 끌어 모으면서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많이 줘서 그런데 생각해 보면 미국의 플랫폼 기업 대한민국의 플랫폼 기업 회장이나 owner들은 나이가 많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면 돈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그리 욕을 먹을까? 
 
1) 30년동안 담배 피우면 

살면서 많이 낸 세금 중에 담배 1 값을 매일 10년간 피우면 세금이? 
10년 890만원, 30년 동안 피우면 2700만 원 세금냄 

 

2) 30년동안 소주 1병씩 음식점에서 1주일에 한 번에 2병씩 캔 2병 마셨다면  :  11만 원 

 

 

우리는 30년동안 정상적으로 술 담배 해 왔다면 2천만 원의 세금을 세금 외에 꾸준히 냈다. 물론 경마장, 경정, 복권 이러한 사행성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얼마나 기적적으로 세금을 군말하지 않고 냈는데 이제 나이 들었다고 퇴물 취급한다는 것은 불합리 하단 말이다. 
석유의 침전물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 

가만히 들여다 보면 석유는 저마다 다른 층을 가지고 있다. 바위에 물이 석유와 가스 끓는점인가? 분해하다 보면 중유, 경유, 휘발유, 석유 각자의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와 문화는 이러한 변동성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성과 장단점을 알지 못하면 많은 것을 놓치고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쓰임새를 잘 알아 제일의 용처를 주는 것 그것이 리더가 할 일있은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들이 세대 간의 표차 이를 의식해 갈라 치기를 하고 있고 기업의 owner는 이러한 기업의 리더가 해야 할 필수고려요인을 배제하고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일방적인 문화의 왜곡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 흙은 하나로 보이지만 흙속에는 바위도, 물도, 석유도, 개스도 모든것이 묻혀져 있다. 흙속에 묻혀있는 무한한 자원은 끝도 없이 묻혀있고 바다속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알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보이는 것만 보일뿐 하나의 땅과 바다로만 보일뿐 왜냐면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아는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떳을 것이고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평형을 이루고 그 평형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솟아있는 보도블럭도 사실은 어디 한 곳이 침하가 일어나 생겨났을 것이다. 커다란 씽크홀이 있으면 커다랗게 빠져들어간 만큼 그만큼 솟아날 것이다. 아마도 무조건 억누르기만 한다면 아마도 어느 한 곳은 솟아올라 넘어져 정강이를 깨뜨릴 수도있다. 고갯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이 내리막을 많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정말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리막을 이 '멘탈'을 공유하고 거기에서 삶의 어드바이스를 들을 수 있다면 이것이 세상을 혼합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 방식에서 우리는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구성원이 됐든 국가나, 가족이나, 회사의 구성원이 됐든 저마다의 길을 세대의 구성원은 누구든 끝까지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이 그 'melting pot'을 구성한 다양한 인종과 구성원들을 안기 위한 방법이 전쟁 실종자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찾는 노력의 모습에서 안정감을 얻듯이 우리또한 너무 빨리 실망하지 말고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그것을 통해 구성원의 열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삶이고 하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보도블록을 지나칠 때 하나만 올라와도 부상과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 바퀴에 살을 보면서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있을까? 바큇살이 너무 많아서 하나의 살로는 불가능하고 회전도 할 수 없다. 역시나 전체가 하나의 완벽한 팀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화란 사회란 모름지기 이러한 갈등과 tension을 기본축으로 한다는 것이다. 난 이 갈등이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요소라 생각한다. 이 바퀴가 굴러가기위해 지지와 압력을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퀴를 잘 만들었던 민족이 이 균형감을 일찍 성과를 냈던 민족이 아직도 자동차라는 공간으로 그 헤게모니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문화란 하나의 정신적 자산이다. 자신은 결국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인 것이다. 대내외적인 경쟁과 침체, 그 황폐함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자산도 중요하지만 정신인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자산으로 난관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은 풍부한 상상력의 토대 위에서 과거와 경험을 소중히 하는 문화적 토대 위에 현재를 굳건히 올려놓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정신적 에너지를 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에너지를 혼합해야 한다면 만약 흰 것을 다 걷어내고 빨간공으로만 채우

 는것 보다는 혼합물을 가장 알차게 에너지가 물이 덜 빠지도록 최대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가 촘촘하게 서로의 간격을 오밀조밀하게 연결된 쪽이 낭비가 덜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인 에너지를 덜 소비하고 버틸 수 있도록 문화적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사회적 발전과 가족의 건강함을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 우리가 나이대를 이르는 것을 보면 난 불혹하지도 않고 지-천명하지도 않다. 나는 아직 미약하고 욕심도 많고 아직도 욕망에 불타오르고 주머니에 돈만 부족할 뿐이다. 

최소한 이러한 생각으로 오늘을 산다. 얼마나 어리석고 불완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주변에 사회 인식이 나의 객관적인 그 나의 존재에 'age'라는 속성을 붙이면서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 나이가 들었다 해서 상상력이 줄어드는가? 몸은 재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몇살 부터일까? 
어느 나이가 되어야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최소한 이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있을 듯하다. 죽을 때까지라고,,,
이성과 감성이 철저히 결별할 수 있을 때 그때는 오로지 죽음이라고 난 알지 못하는 결국 나이테라는 건 잘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나이테는 나무 밑동을 잘라야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평가되는 잣대는 모두 거짓이고 잘못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로 나이는 허상일 뿐이고 국가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좁혀갈 뿐 좁혀지지 말자고 이 글을 써본다. 그 편견의 프레임을 좋아하는 자는 그것으로 이득 보는 자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감정에 사회에 반하지 않는다면 즐기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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