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교수님 우리 교수님
앞으로 이분들은 PPT 띄워놓고 매일 읽기만을 하던 교수님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교육에 많은 혁신이 필요한 때가 온것이다. 드디어 creative하지 않은 교수 방법은 이제는 한물 간 기억이 될것이다. ai가 가장 밥줄을 끊는 직업은 교수 선생님이 될것으로 본다. 플랫폼 노동자들 즉 획일적인 주의를 받는 직업으로 부상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대학은 사회에 나와 기여를 못하고 있고 92년부터 지속된 제조업의 노동자들은 이미 직업속에서 감소되고 있었다. 어머니가 모든 수업의 커리큘럼을 다 정하고 아이들은 사실 기계부품처럼 그 계획에 촘촘히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대학은 사실 어머니들의 욕망이었고 모든 목표가 되어왔던 것이다. 그들에게 목표는 부여받은 목표이고 삶은 어머니의 ego의 삶이었다.
고등학교는 유명무실한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터미널이었고 아이들은 갈아타기 위해 터미널에 잠깐 들렸고 실제로 그들은 대학으로 실어 나른 것은 엄마의 차이고 학원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어머니가 만든 가상의 공간이 대치동이었고 대치동은 아마도 점점 공간을 확대해 이제는 대치동은 하나의 code로 존재한다. 난 이코드가 생성한 이 지역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는데 그동네를 폭파시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치동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대치동은 대치(大峙, 큰 대, 산우뚝할 치)라는 한자어를 큰언덕이란 뜻으로 불리어졌다.
세상에 . 1963년 서울특별시 편입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리였던 것이다. 청담동이 바로 조선 때부터 쓰여온 대표적인 이름이다. 『서울지명사전』과 『2013 강남구 구정 백서』에선 맑은 못이 있고 한강변 물도 맑아 청숫골이라 불렸다고 소개한다. 14년 이후엔 청담리, 63년부턴 줄곧 청담동으로 불렸다. 논현동은 논이 많아 논고개라 불린 것이, 역삼동은 역촌 세 마을을 합친 것이, 매봉산 자락이던 도곡동은 돌이 많아 독구리·독골로 불리던 게 동명 유래다. 대치동은 조선 때부터 한티, 또는 대치(大峙)로 불렸다. 큰 고개가 있어서다. 광주군 언주면 대치리가 75년 삼성동으로 통합되는 바람에 잠시 이름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80년 삼성동에서 분리돼 이름을 되찾았다.
교수를 이야기 하다가 왜 대치동으로 갔는지 잘 모르지만 대치동은 한없이 자본화되어 극대의 capitalism으로 형상화 됐다. 일반고등하교 선생님과 교수 대치동 강사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생님이 최고의 직업이었던 존경받고 사랑받는 직업으로 존재했던 때가 있다. 체벌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람 만들어 달라고 보냈던 아이의 교육은 선생님이 모든 생사여탈권을 쥘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권한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때가 있었다. 이 부분을 약하게 한 것은 사교육이라 불리우던 과외라는 부분이 하나의 경쟁력으로 사교육으로 성적으로 올려줄 수 있었던 부분이 점점 커지고 있다. 지금의 사교육의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고 입시제도가 현재 처럼 여러 과정이 입히면 입힐수록 더욱더 교육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더욱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입시제도는 자본이 더한 정보력과 수준높은 교육덕택에 더더욱 그 편차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선행학습과 지칠대로 지친 아이들을 상대로 더욱더 지치게 하는 것이 교수인것이다. 상상력을 불허하고 교육을 또하나의 습관과 악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