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lture

경복궁

by 링마이벨 2023. 5. 15.
반응형

광화문을 현판을 지나서 첫번째 보이는 편각이 흥례문이다. 예는 임금과 신하의 예도 있을것이고 백성과 임금과의 예도 있을 것이고 부부사이의 예도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예를 중시하는 문화는 어디에서 기인할까?  목구녕이 포도청이고 임금이 엄동설한 얼음땅에 쿵소리 날정도로 절을 해도 그놈의 예라는 것을 이렇게 정궁에 첫번째 출입문에 새겨 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예라는 것이지 않을까? 예가 흥할 수 있을까?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는데도 예의를 숭상했던 민족 그 예의 뿌리를 정도전은 여기다 심어 놓았을까? 예의 국가지상주의를 새겨 넣었던 것은 과연 어떤 연고에서 기인한다는 말인가? 예가 목숨보다도 소중하고 귀하겨 여겨진것은 과연 어떤 연고로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는 아마도 정도전의 성공한 혁명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음양오행의 괘를 궁궐에 초입에 걸었다는 것 임금은 천지인 삼재중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의 제를 지내는 제사장인것이다. 유교주의 입장에서 제사를 지내는 아마도 향의 연기라도 하늘에 맞닿고 싶은 것이다. 하늘을 잘 아는 사람 천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이가 아마도 국가와 공동체를 끌고 나갈 수 있는 리더의 자격이 된 것이다. 거기에 조선은 유교와 학식을 소유한자만이 조선을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자리는 자격과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자리임을 교육으로 또는 프레스를 가하였던 것이다. 

서까래에 올려 앉은 동물들은 9개의 조형물이 존재한다.  연목단청모양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처마끝이 저렇게 아름답게 연결돼 있는지 모른다. 잡상은 기화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줄줄이 놓이는 토우(흙으로 구워만든 인형)으로 나쁜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것입니다.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등 궁궐의 지붕에 잡상이 세워져 있는데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과 토신의 형상으로 3개~ 11개의 홀수로 돼어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크레인의 문화재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것은 문화재를 예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 우선인지 사실 무너지는 대로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 무질서상태의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넘 현대적인 기술처럼 보이고 현대의 기술이 반영돼는 것보다는 그 형태 그대로가 유지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가 우선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그 다음 돌계단에 근정문이라는 편액이 나온다. 정치를 함에 있어 부지런함을 이야기 하는 것 부지런함이 지금에 와서 능력과 다른 덕목보다 가벼이 여기기도 하지만 지아비로서의 임금의 역할은 끝이 없음을 보여준다. 아 얼마나 숨막혔을까? 궁에 산다는 것은 끝이 없는 의무와 책무 사이에 어떤 것도 지나칠 수 없는 그 숨막힌 디테일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근정전앞에 서면 무한책임과 무한대의 피맺힌 열정이 숨겨져 있다. 엄청난 자기관리와 또는 엄청난 권력의 살얼음판위로 중심을 잡고 어찌 한시간이라도 맘 편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근정전은 아마도 내가 지금껏 다녀온 개근상장이라는 의미를 아무래도 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생성했을 것이다. 근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민족 코로나가 와서 재택근무를 하는 유연성을 도저히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지식한 문화를 만들었다. 그 유교를 꽃피웠지만 실은 민간신앙은 백성들 사이에서 너무 너무 넘쳐나 통제가 안된 것이다. 민간신앙과 점을 보는 문화는 아마도 국가가 유교를 교훈으로 삼았지만 아래 백성까지는 흡수하기에 너무 벅찬지 않았을까? 

근정전 앞쪽에 보면 물이 흐르는데 이 물은 아마도 속세의 나쁜 기운을 아마도 궁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도깨비형상을 한듯하다. 얼굴형태는 도깨비의 형태를 하고 몸은거북이의 등껍질같기도 하고 다리는 발가락이 3개인데 어찌 저런 형상을 했단 말인가? 약간은 웃는 모습으로 경직돼지 않고 새로운 사람의 부담을 줄이고 허허이 웃는 도깨비 형상을 한 것이다. 만약 험악한 형상을 한 이라면 아마도 적지 않게 이 모습을 보고 당황하였을 것이다. 허허로이 웃지만 이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고 웃는 모습을 아무리 험악하고 그 경계심을 흐트려 뜨리고 어떤 것도 그냥 보내지 않으려는 강력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양쪽문에 일화문과 월화문 두개의 출입구가 존재한다. 일화문은 문반이 월화문은 무반이 출입하는 주요통로라고 하는데 문하나 출입문 하나 그냥 출입하는 경우가 없다. 실제로 우리의 출입문은 구별이 엄청나게 존재했었다. 때로는신분이라는 것이 때로는 왕과 신하로 너무나 많은 차별과 구별이 존재했던것 같다. 만약 정도전이 꿈꾸는 세상이 실제로 평등하고 신분을 철폐하고 새로운 평등의 사회를 꿈꾸었다면 '예'라는 그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집현전이라는 왕립 아카데미를 좀더 실사구시를 위해서 힘을 썼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는 한발 더 현대로의 발전을 모색했을텐데 말이다. 자연현상의 해와달에 이렇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더 좋은 조선왕조를 빨리 개혁으로 더 큰 발전을 이룩하였을텐데 말이다. 

유화문은 흥례문 서쪽으로 궐내각사로 진입하는 통로이다. 경복궁 서남쪽에 있는 궐내각사로 가는 정문으로 정전 근정전에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조회뿐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여러 중요한 행사들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유화전은 화합과 조화를 이루자는 문이다. 조화만큼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 있었을까?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화'만큼 중요한 것이 있었을까? 아마도 어떤 것도 그 덕목을 대신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천지인 하늘과 땅 사람중 왜 유독 임금을 쥐고 흔드는 정치적 세력들을 만들었을까? 너무나 불필요하고 많은 이들이 그 하늘과 땅 그사이를 혼탁하게 만들었고 그 혼탁함으로 인한 이기적인 셈법을 하늘과 땅 공간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혼란을 야기 했다. 

기별청은 궁궐 내의 우체국같은 곳이랍니다. 기별청은 유화문 옆에 딸린 작은 꼬마같은 모습이네요. 유화문은 원래 임금님을 만나려 드나들던 관리들이 주로 출입하던 문입니다. 여기를 지나면 임금님을 뵙는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별청에서는 미리 출입하는 분들을 통제해서 순서를 정해주기도 하고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지 그날의 소식지인 기별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관리들은 유화문과 기별청을 지나면서 임금님이 오늘 무슨 일에 관심이 있으실지, 중요한 일은 무엇일지 알 수 있게 되고 마치 현대인들이 아침신문을 읽는 것처럼 기별지를 읽었을 겁니다. 아 그러면 지금의 비서실장이네여! 조보를 만들어 낸 부서인가? 오늘날의 홍보실인가? 비서실인가? 아무래도 그 둘의 업무를 다 하던 장소였을 듯 싶다. 

그럼 말이 예까지 들어와 똥을 쌀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올때 해가 쨍쨍할때 천막을 매달던 고리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고리는 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아마도 무언가를 심하게 고정하지 않았나 싶다. 이 문고리는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어깨 높이의 문고리와 연결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땅바닥에 고리를 고정해 놓은것으로 볼때 천막이나 해빛과 비를 피하기 위한 천막을 고정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박석고개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 많은 이유는 아마도 질퍽한 진흙이나 배수가 안되는 도로에서 이 박석만큼 요긴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해가 비추어 반사되지 않아 좋고 박석은 조선땅 어디에든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지붕의 층을 달리할정도로 이렇듯 계급이 계열화 되었을까? 계단을 많이 두었다는 것은 엄격한 신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유교의 가르침처럼 인의예지가 중요한 인본에 왜 하나도 그 가르침이 반영돼지 않았을까? 계급은 어디에도 적용돼는 것이다. 옷 신발 복장하나 건축양식등 모든것에 표현돼어 있다.

인간의 손때만큼 대단한 흔적이 있을까? 인간의 손은 나약하지만 무쇠도 이 거대한 돌도 흔적도 없이 갈아버릴 수도 있다. 우리의 

난 문꼬리에 애착이 많이 간다. 문꼬리 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이유는 가장 많이 손이 가고 우리의 주변에 있어서 가장 친근한 것들이 존재한다. 둥글둥글 어느것 하나 모난 것이 없다. 둥글고 타원형에 각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친근하고 원만한 것들만 존재할 뿐이다. 동그란것은 윤회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처음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하나로 이어져서 또 이어질 뿐 우리의 인연이 그리고 위압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쥐기 좋은 원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로시 임금의 뒤에는 해와달이 5개의 봉우리가 있을뿐이다. 깐느도 아니고 대종상 시상식도 아닌 스폰서는 5개의 봉우리 해와달 소나무 앞에서는 봉황이 있고 외롭지 않게 주위를 감쌀 뿐 어떤 위압감도 없다. 작은 우주일뿐 그 어떤 것에도 사치는 보이지 않는다. 

경첩하나 기둥하나도 너무나 잘 포장돼있다. 작은 우주처럼 최대한 못질을 줄일려고 하는 의도로 창틀은 못질이 없고 나무장식하나 잘 정리돼 있다. 낙엽의 그림자로 보이기도 하고 아마도 안에서 보면 밖은 꽃의 프레임을 가졌을 것 같고 태양이 비추면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온몸을 구석구석 비춰줄 것이다. 궁이라고해서 어디에도 금장식을 한 곳이 없다. 금이 비싸고 좋았겠지만 금은 사치로 보여 어디에도 그 사치는 들어올 구석이 없었다. 검소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촌스럽지도 않았다. 

 

인간의 손만큼 강력한 흔적은 없다. 발자욱이 수천년이 지나서 나타나듯이 손은 돌도 쇠도 갈아서 없앤다. 흔적을 남기고 그 손때는 자자손손 하나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자손대대로 이어져 나간다. 

정치를 생각하는 문이다. 아마도 이 문에 들어설때마다 갑자기 또는 강요하듯이 나의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였으리라! 결국 경복궁은 왕의 침소가 아니고 실은 정궁이고 오피스공간이었던 것이다. 정치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경복궁은 나는 배제된 왕의 공익의 실현의 장소였던 것이다. 어디 하나 헛으로 지어진 공간이 없고 숨을 공간 쉼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춘전 세상에 봄을 가져다 준다. 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본다. 

천추전은 만춘전과 쌍벽을 이룬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는 데 비해 천추전과 만춘전에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사정전의 쓰임새를 보완하였다. 전각의 이름은 동쪽이 만춘, 서쪽이 천추로서 동쪽을 높이 보았다. 왜 이렇게 방향에 몰두 했는지 보면 동쪽은 해가 뜨는 쪽으로 침전도 모두 동쪽에 있는 방 즉 햇빛이 많이 드는 방으로 생명력이 살아 숨쉬는 방을 선호했던 것 같다. 동과서의 방향은 너무도 극명히 분류시켜 놓았던 것 같다. 

 

경복궁에서 경회루만큼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여기서 사신을 맞이하여 시를 짓고 운율을 이야기 하며 조선의 최고의 전성기를 어찌 지냈단 말인가? 얼마나 경사가 일과 호사스런 일들이 여기에서 펼쳐졌을까? 조선의 최고 상류사회의 여흥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물에 비춰지는 팔각정의 모습이 시시각각 틀려지고 호수의 물은 점점 파문이 일어나네! 경회루에 비춰지는 물의 모습은 형형색색 시시각각 달리 비추어주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