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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들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by 링마이벨 2019.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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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언어의 논리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올바른 철학은 언어의 사고와 본질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가능한 세계에 대한 한계에 대해 불가능한 가치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한계를 통찰해서 내가 못하는 영역을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라 볼수있다. 결국은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A COMPANION TO WITTGENSTEIN'S TRACTATUS에 실린 독일어 용어 색인등을 기초로 하여서 작성됐다. 한계란 것은 언어에 의해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것이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는 아니다. 

세계는 사실들에 의하여 ,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들이라는 점에 의하여 확정된다. 

왜냐하면 사실들의 총체는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그리고 또한 대체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공간 속의 사실들이 세계이다.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하나의 일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사태는 대상들(실물들,사물들)의 결합이다. 

사물에 본질적인 것은 어떤 한 사태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속에 나타 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 자체로 홀로 존립할 수 있을 터인 사물에 어떤 상황이 나중에 가서 걸맞게 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우연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이점은 이미 그사물들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논리는 모든 가능성을 다루며 모든 가능성들은 논리의 사실들이다.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밖에서 결합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대상을 사태라는 연합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러한 연합의 가능성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다. `

내가 대상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사태들속에서 나타날 가능성들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어떠한 대상을 알기 위해서 그 대상의 외적속성들을 반드시 알아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대상의 내적 속성들을 모두 알아야 한다. 

모든 사물은 말하자면 가능한 상태들의 공간에 있단. 나는 이 공간을 텅 비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물을 그 공간 없이는 생각할 수는 없다. 

시야속의 얼룩점이 붉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던 색을 지니기는 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둘레에 공간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음은 어떤 높이를 지녀야한다. 

대상은 단순해야 한다. 

만일 세계가 아무런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한명제가 뜻을 가지느냐는 다른 한 명제가 참이느냐는 참이냐에 달려있게 될 것이다. 

대충말해서 대상들은 색깔이 업다. 

실체는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확고한 것과 존속하는 것 대상은 하나이다.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형식은 구조의 가능성이다. 

그림은 논리적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가능한 상황임을 묘사한다. 

선천적으로 참인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사고들의 총체는 세계의 그림이다. 사고는 그것이 생각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일찌기 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만 제외한다면 신은 모든것을 창조할 수 있노라고 말했다. 요컨대 우리는 "비논리적" 세계에 관해서는 그 세계가 어떻게 보일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와 모순되는 어떤것을 언어에서 기하학에서 공간법칙과 모순되는 도형을 좌표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또는 존재하지 않는 점의 좌표를 제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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