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예보 지젝과 조던피터슨 동영상
수억 명이 빈민에서 중산층으로 강력한 전제주의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함 20세기 좌파 두 가지 특성 자본과 시장경쟁을 장려하고 강력한 국가 주도의 성장을 결합한 형태 거기에 인민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함 그러나, 중국국민은 행복해졌을까요! 위대한 달라이라마가 행복의 추구와 소통의 소멸을 말할지라도 인간이 자신을 행복을 파괴하는데 천재적이랍니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주체가 결과를 모르는 욕망을 추구할 때 발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마치 원하는 듯이 행동합니다. 오늘날 가장 끔찍한 일은 우리가 원하는 척하는 게 실현돼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삶을 이어가는 쾌락이상의 의미 잇는 이유가 필요한 겁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우리를 정당화를 맡아주는 무조건적 권위에 더 이상 기댈 수 없습니다. 근대성이란 결국 우리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무를 더 이상 변명으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전통권위가 기반을 상실한 이상 다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트럼프가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자로 보이시나요? 트럼프른 극단적 자아도취에 있고 보수인척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초월적인 근거와 가치를 상실한 데서 오고 학살과 약탈과 방화를 보면 종교가 나쁜 사람들을 착한 길로 이끈다고 하지만 무신론이 초래하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오늘날 벌어지는 중동의 종교전쟁은 신의 명령을 받는 자들만이 민간인 수백 명을 개의치 한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역사의 필연적 대리인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이데올로기입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맛이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책임지고 고통을 안고 가는데 맞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고통받는다고 당신의 진정성이 주어지진 않습니다. 쾌락의 희생은 희생의 쾌락으로 쉽게 변질됩니다. 타자를 향해 자신의 친절함과 정체성을 과시하며 백인 다문화주의자들은 정체성을 파는 사기꾼들입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자가 아내의 외도를 주장할 때 비록 아내가 실제로 그러할지라도 그는 상당히 병적이다. 병적인 요소는 그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의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주장한 것들이 사실일지라도 여전히 나치의 반 유대주의는 병적인 현상입니다. 병을 고치는 필요한 질문은 왜 나치가 반 유대주의를 왜 필요한가입니다. 나치는 사회를 유기적으로 만들고자 내부의 분열과 적대적 요소를 외부인에게 투사한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럽의 난민문제를 글로벌 자본주의에 내재한 문제가 외부인에게 투사되고 있는 겁니다. 반이민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사실에 접근하는 형식자체가 틀린 겁니다.
히틀러는 난국에 국민들에게 스토리를 제공한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ㅇ유태인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자신을 스토리의 일부로 감정이입하게 된 것입니다.
지혜만큼 모호한 말도 없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적이다. 이게 사실일까요? 스스로를 이야기 속에 집어넣고 그 질서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 이게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형식이고 진실은 우리 행위 밖에 있는 겁니다. 같은 방식으로 대안 우파들은 불편한 사실들을 외면하려 듭니다. 도덕적 해이, 성규범의 문란, 쾌락적 소비지향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마르크스 사회 탓으로 돌립니다. 문화는 자본주의 재생산의 핵심요소이며 문화적 체험 그 자체가 상품화된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이용 어는 나치스토리에서 유대인의 역할입니다. 트럼프의 이미지는 일종의 숭배현상이며 질투, 원한이야말로 내 관심사와 정반대의 것을 하게 만듭니다. 이타심으로 포장된 것이 은밀한 도착을 숨길 수 있습니다. 과도한 통제는 패배를 가리는 가면입니다. 최근 미투의 경향성을 볼 때 가해자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고요! 그게 진정한 항의를 단순한 원한으로 변질시킨 겁니다. 오늘날엔 자본주의가 더 개성을 없애버리는 것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좌파는 계속해서 기반을 상실 중입니다. 좌파의 상징인 의료복지와 무상교육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연은 결코 안정된 구조적 시스템이 아니라 임기응변의 결과물이란 겁니다. 프랑스 음식은 대개 일반적인 음식을 만들려다가 맛이 간 것들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사람의 성적욕구는 대개 본능이 영구적인 집착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집착은 형이상학적인 열정을 통해서만 잠깐식 충족됩니다. 본래의 생물학적 루틴이 끝없는 열정과 도착적 행위들로 변형됩니다. 기괴한 논리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입니다.
TS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고 현재의 창조는 과거를 뒤바꾼다. 성령이 강림한다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의 논리로 사용되었고 모든 차이들을 두고 궁극적 주권을 함께 나눠 갖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교훈은 우리가 모든 권력을 전문가들에게 맡겨선 안 된다는 겁니다. 저는 평번한 대중의 지혜도 잊지 않습니다. 자유와 책임은 고통스럽고 많은 노력을 요구합니다. 주인의 진정한 기능은 노예로 하여금 자유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혼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키에르 케고르의 "만약 아이가 아버지를 따른 게 아버지의 능력 때문이라면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모욕이다." 이 논리를 종교로 확장해 보면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신성한 것이지 그 자신의 능력 때문은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연은 이런 권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것은 능력에 따른다. 그런데 정치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요즘 생태적 재앙, 생명공학, AI, 새로운 기술의 등장 새로운 계습의 형성입니다.
외부의 자연은 환경오명 여러 가지 위험 리스크를 안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숲이 없어진다는 우려는 지금이 100년 전보다 더욱더 많은 숲이 형성이 됐지만 재앙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광범위한 집단적 접근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개인 스스로가 생태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 도덕적인 관심보다는 그 이상의 강제적인 규제와 절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산을 가로막는 서울의 아파트는 이제 남산이 문제의 중심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포퓰리즘이 만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기업들의 이익과 관심을 억누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내부의 자연으로 기술의 발달 부분입니다. 뉴럴링크가 만약 뇌와 연결된다면 세계가 더 많이 공유되지만 그만큼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바깥세상을 지켜 장막을 높이는 것,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열정적으로 LGBT를 지원하고 이 난민사태에 책임은 자본주의 시장 외에 제하하고 규제를 강화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국가권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기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 지식인의 갑론을박이 얼마나 세련되고 전문가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부럽다. 대한민국이 이런 논쟁을 YTN, 연합뉴스에서 볼 날이 있을까? 싸구려 정치 양비론이나 맬 듣는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이제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