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요일마다 쓰레기를 버리는 system이다. 기존에 목요일 토요일 버리는 시스템에서 일요일 pm 1:00시 이후부터 버리는 시스템이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상당히 많았기도 했지만 이분처럼 바리바리 하신분은 처음본다. 나이는 65세 이후 정도이고 매번 쓰레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의 쓰레기를 하나 하나 시선을 떼지않고 정확히 어떻게 분리하고 버려야 하는지를 이야기 하시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가끔은 언잖고 불편할 수 도 있는데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심지어 유료 봉투에 담어서 버려야 하는지도 명확히 이야기 하신다. 두꺼운 마분지는 마분지대로 모래성을 쌓듯이 아주정교하게 성을 쌓으신다. 마치 성벽을 쌓듯이 그리고 벽돌집을 쌓듯이 하나 둘 하나 둘 모아서 정확히 하나의 형태를 루틴하게 쌓아 가신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 일을 이렇듯 치밀하고 단단하게 내일이면 쓰레기차가 와서 모든것은 허물어 뜨리고 가져갈 텐데 오늘 이 쓰레기의 정리 업무는 끝이 없어 보이고 매시간 매순간 아주 견고한 성으로 높이를 더해간다. 난 10층에 살다보니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이 일을 천천히 조용히 지켜보곤 한다. 얼마나 예리하게 쌓여지는지를 보면 아마도 저성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어떤 의미없는 일들도 저분한테 가면 의미가 있어지고 하찮음이란 진정한 가벼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가벼움이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가벼워 보일 뿐이지 가벼운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세상에 대해 진지함을 어떻게 나는 유지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의 가벼움은 결국 내가 가벼운것이지 그 가벼움이 어떻게 세상의 진지함을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기본조차 존재하지 않음을 느껴본다. 어떤 순간에 내가 진지해졌던가? 상가에서 병원에서 나의 무미 건조함과 무기력인가? 어떤 순간도 최근에 진지해져 본적이 있는지 누군가에 대해 진정 존경하는 마음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사안이 주는 진지함은 오히려 외부적 환경요인에 의해 강요당한 진지함일수도 있고 내가 social 한 동물이기 때문에 그 사회가 나에게 안겨준 진지함을 강제로 떠안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10층에 앉아서 그 아저씨의 수많은 행동의 루틴을 그 10m 반경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행로의 이동을 끊임없은 선으로 연결하는 상상을 해본다. iphone의 빠른 사진동작이 많이 진행되었을 때 나는 드론위에서 마지막으로 바라 보았을때 하나의 점으로 귀착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보았는데 실질적으로 상상의 결과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면 하나의 점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지상에서 보면 하나의 점으로 밖에 인식되지도 않는 그 인간이 바로 나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한점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살다가 이 세상에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면서 결국 너무나 커다란 다른 하나의 점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란 이러할 진대 난 마치 내가 잘나 보이고 커 보이는 착각을 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만약 이 착각으로 살 수 없다면 난 너무나 허망한 허탈한 삶을 이어나갈지 모른다. 나의 착각이 나를 떠받치는 커다란 힘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이 착각으로 내가 행복해하는 그 커다란 모래위의 누각에 앉아 세상을 바라 보는 것이다.
내가 하찮아 보이는 그 궤적이 나의 직장 생활 지금의 궤적이 명확하고 그 궤적을 대단한 궤적이나 되는 양 착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나를 떠받치는 힘이 착오라는 베이스먼트를 지녔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어 보인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자라고 어디에서 가는지 몰라도 routine을 혐오하고 지겨워 하는 나를 보면 나의 루틴이 내 삶의 원동력임에도 불구 하고 그 루틴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루틴을 삶이라고 대치하게 된다. 나의 일상은 결국 나의 꾸준함의 끊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띄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안과 밖이 수시로 바뀌고 본질과 형상이 바뀌고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후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장소와 시간을 떠난 한참 그 이후에 그러한 삶과 루틴이 일상과 나의 행복과 어떻게 연결돼어지고 나는 결국 그 원안에 있었는지 그 당시 나의 머무름을 이해 하게 되는 것이다.
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어떤 루틴도 일상도 나에게 커다란 깨우침과 일상의 위대한 힘을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지금 옆에 존재하고 서로의 일을 하나 하나 채우며 오늘을 지내고 있는데 나는 어떤 시간의 흐름도 피해가며 평일은 휴일을 지향하고 휴일은 업무를 지향해 하는 이러한 형편없는 삶과 기피의 삶을 사는건 아닌지 모르겟다. 오늘의 이 사소함이 어떻게 나를 만들고 나를 형성해갈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면서도 나는 이 기피의 도피처의 삶의 자세로 오늘을 살아 나간다.
이사하고 나서 넘 운동을 기피하고 사는것 같다. 나의 삶중 나는 땀을 상당히 존중한다. 내 몸에서 스스로 발현되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더욱더 겸손하게 모든 것을 받아 들이게 하고 더욱더 나의 게으름과 나의 인식의 부족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삶이 내가 일부러 버리는 그 잉여의 삶중 하나로 인식하며 낭비하며 사는 나에게 호되게 진지함에 대해 삶의 진지함은 커다란 애드벌룬이 아니고 내가 매일 매일 숨쉬는 지금 이순간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다. 그 사소함을 존중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그 분의 삶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한켠으로는 잘 난척하는 내 내면의 모습에 냉정한 한수와 이빨이 시리는 듯한 머리가 뻥 둟리는 신선함을 경험해 본다. 우리가 소중해 하는 행복한 삶에 대해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커다란 IDEA를 쫓는듯이 보여지지만 사실 일상을 통해 맬 맬 그 일을 실천하는 일상의 실천가로 나는 우리 아파트 관리 아저씨를 추천하고 싶다.
정말 모양 빠지지 않고 자기의 삶에 One hundred percent 충실하시는 그분의 삶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한편으로는 아파트 위 층에서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그것이 경멸과 감시가 아닌 존경으로 한동안 멍허니 쳐다본것에 죄송함을 느끼긴 합니다. 그리고 이땅에서 오늘도 대단한 일을 했을 것 같은 착각을 한 이중에 가장 심각한 중증환자가 있다. 그 사람은 어떤 진지함도 얼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타나지도 않지만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빨리 돼지우리에서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