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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위리안치(圍籬安置)

by 링마이벨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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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한 형벌이 있었을까? 바닷가 앞에 바닥이 훤히 보이는 바다나 깊은 산중에 홀로 자기의 영역을 만들어 그것을 넘을 수 없는 형벌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었을까? 일상에서 나의 생활권을 제한했던 것으로 내 집 울타리로 제안하고 울타리는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싸 거주 제한을 가한 것이다. 거주 제한을 가한다는 것은 생활권을 제한하고 영역을 지정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적 자율적인 자율권을 제한한 것이다. 

 나는 이 위리안치라는 형에 대해서 왜 이러한 형벌을 주게 됐을까? 폭력으로 형벌로 빨리 대응하는 것과는 달리 사상과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경계는 내가 사는 집 울타리를 나의 제한으로 그리고 울타리를 가시가 돋힌 탱자나무로 영역을 제한하고 아무래도 현실의 영역을 제한하여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간접적으로는 사상의 자유와 숙식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체통과 권위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계를 단절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당시의 유교사회에서는 엄청난 형벌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식료품은 어떻게 조달하는가? 누가 먹을 것을 제공하는가? 가끔 마실 구경을 하고 싶을때는 어떻게 했을까? 경비를 서는 사람에게 형편을 물어서 조금씩 유연하게 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임금을 목숨처럼 지 아비처럼 떠받치는 사회에서 명분과 실리사이에 또는 충절과 배신사이에서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이러한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영혼과의 이별 지인들과의 격리속에 철저하게 외롭고 병들어 많은 삶의 의욕들이 좌절했을 것이라고 본다. 과거 양심수들의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면 현대판 위리안치의 피해자들 아닐까?라는 생각한다.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한 굳은 마음과 결심이 서 있는 것이다. 그 신념을 포기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우리는 댓가로 바라게 된다. 민주주의가 이데올르기를 먹고 살지만 사실 살다보면 이데올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내 신념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나의 신념은 나의 아이덴티티인가? 그런데 나의 아이덴티티를 구속하면 할 수록 억압하면 할 수록 아마도 더욱더 팽창돼고 왜곡돼었을 것이다. 사상적 감옥일 수도 있고 사상의 찌꺼기 일 수도 있다. 결국 아무리 육체의 감옥이 영혼을 잡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 집에다 가두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대단하다. 위리안치의 기원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영혼을 담아 놓을 수 있는 그릇이 집이라고 생각했나! 가장 편안한 장소를 법의 장소로 자가격리를 만들어 버린것 엄청 잔인해 보였던 처사다. 가장 친근함 최소의 공간을 담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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