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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자연의 악(Nature's evil) 천연자원의 문화사

by 링마이벨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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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의 삶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다. 전문화가 항상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이었지만 소농의 농장은 다채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자연의 주기에 맞춰사는 삶은 안정성과 확장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에는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시 생활을 위해서는 오직 소농만이 확보할 수 있는 곡물, 땔감, 기타 많은 것이 공급되어야 했다. 

감자은 게으르고 사악한 농작물로 여겨졌다. 중세시대를 먹여 살린것은 감자였는데 감자는 소출량에 있어서 밀보다 10배나 많은 수확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자는 포토시로 잉카에서 기원했고 유럽으로 전해졌다. 감자는 처음에 최음제로 여겨졌고 아이랜드 월터롤리 (영국의 탐험가이자 군인) 16세기 감자다 처음등장한 것이다. 감자는 밀보다 7배 수확량이 많고 프리드리히 2세가 감자를 발견하여 농부들에게 심도록 강요했다. 감자는 프로이센이 수차례의 전쟁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감자는 살아나가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농작물은 확실하다.  감자와 더불어 동물은 먹이사슬의 상단을 차지하며 육류의 칼로리는 식물성 칼로리보다 더 비쌌다. 조로아스터를 제외한 모든 세계 종교는 육식과 관련해 여러 금지 규정을 두고 있다. 육류는 유통기간이 잛아서 영국 해군은 염장한 소고기와 럼주를 먹고 살았다. 페스트로 인구가 감소한 중세유럽은 육류가 풍부했다. 남미의 카우보이 가우초는 소의 혀를 먹고 가죽을 벗긴다음 시체는 코요테에게 던져 주었다. 서로의 질서는 견고하게 유지돼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만 피했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육류도 먹지 말라고 권고하셨다고 밝혔다. 

프리메이슨 단원은 육류를 삼가했는데 18세기에 육식 절제 지지자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인물은 피렌체 최초의 프리메이슨 집회소를 설립한 이탈리아 의사 안토니오 코키였다. 그는 의사와 여행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괴혈병이 염장육으로 구성된 선원들의ㅏ 휴대용 식량탓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또한 수질오염의 절반이상은 가축탓이다. 글로벌 노스의 가축 사육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이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동물성 단백질이 식물성 단백질에 비해 단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토지는 50배나 필요하고 탄소는 12배나 더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1784년 대구어업이 commonwealth의 복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기념하기 위해서 회의장에 대구를 새긴 나무 조상을 설치하도록 했다. 

 

식민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은 설탕섬?(sugar island)의 노예들, 그리고 금식 기간의 카톨릭 신자에게 소중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대구는 근육질에다 기름기가 없어 건조하기 쉽고 단백질 함량이 말린 소고기보다 훨씬 높은 비율인 80%나 되었다. 청어같은 기름진 생선은 건조하기 적합치 않고 훈제하거나 소금물에 절여야 해서 운반하기에 불편하고 보관도 용이하지 않았다. 대구는 죽은생선의 내장을 미끼로 써서 잡았고 배를 갈라 소금을 넉넉히 뿌린뒤 집게에 고정해 햇볕과 바람에 말렸다. 대구간에서 얻은 기름은 닻의 녹을 예빵하거나 증기기관차 윤활유로 쓰였다. 암컷 한마리가 300만개의 알을 낳니 번식력은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300만개의 알을 낳고 대구가 어떻게 존재했을까? 온몸의 영양분을 다 알에 양보했으니 말이다. 대구는 연어만큼이나 자식사랑이 대단한가 보다. 유럽인은 13세기초부터 스칸디니비아 북부 해안에서 들여온 말린 대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바른대구는 머잖아 한자동맹(독일북부와 북유럽의 5세기 지속되었던 상인길드)의 중요한 상품이 되었다. 생선과 육류는 역설적인 특징을 한가지 공유한다. 어는 시장에서든 신선육은 냉동육보다 비싸다. 하지만 냉동육을 생산하려면 더 많은 자본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생선을 비롯한 여타 부패하기 쉬운 상품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자는 육류나 생선한 조각에 비용을 지불할때 우리는 실상 그 자체뿐 아니라 폐기되는 모든 조각에 대한 비용까지 치르는 꼴이라고 말한다. 

모피는 늑대, 들소, 사슴,양등 보존처리 없이 주거의 일부로 쓰였고 흑요석 칼날로 자르고 뼈바늘에 이어붙임으로서 의복과 신발을 지을 수 있었다. 모피는 북유럽의 상품으로 수입원이자 전환 가능한 화폐로 떠오른 것이다. 

KUNA는 담비로 바이킹이 러시아 영토에 최초로 들어선 조직으로 '노브고르도'지역에 소농에게 소작료 형태로 다람쥐 가죽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을 햇다. 다람쥐 서식지는 인간 서식지와 대체로 일치했다. 물기 없고 가벼우며 조건만 맞으면 다람쥐 가죽은 이상적인 상품이었던 것이다. 가죽의 보존처리는 잛고 대체로 여성들 몫이었다. 러시아 모피는 런던, 피렌체, 파리로 갔고 그 대가로 노브고로드 상인들은 은,무기류,직물,청어 및 비철금속을 받았다. 모피무역은 또한 무역 공화국이 용병을 쓰기위한 상당량의 은을 보장해주었다. 러시아인은 모피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해 북아시아, 북아메리카등 광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역사를 보면 모스크바 대공국의 귀족들이 흑단비, 비버, 어민등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해 쓴 코트와 모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흑담비 sable은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유입된 단어중 하나다. 은이 부족하던 시절, 가죽은 모스크바 공국의 화폐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정복자들은 러시아의 추크치족, 캄차달족, 코랴크족을 포함한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저항에 봉착한 러시아인은 공개적 태형부터 대량학살에 이르렀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가죽을 빼앗는 방법은 아마나트 방법으로 러시아는 남성들이 야삭을 지불할때까지 여성과 어린애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1560-1570년 모피의 수출무역과 국내무역을 차르가 독점하였고 크렘린 재무부에서 토끼가 흑담비를 대체하자 러시아 역사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비버 가죽은 작고 사냥하기 쉬워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뉴욕은 비버덕에 발견되어진 땅인 것이다. 1609년 이 편리한 항구를 발견한 헨리 허드슨은 처음에는 잉글랜드의 머스코비 회사를 위해 , 그담은 동인도 회사를 위해 원주민과 모피를 거래했다. 세상에 유럽인들이 머리에 쓸려고 만든 모자가 동물들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니 답이 쉽지를 않네! 비버모직은 빗질하고 가공하면 가죽보다 따뜻하고 튼튼한 방수 펠트가 되는 것이었다. 모자 제조업자들이 신경계질환에 걸리거나 미치거나 사망한 이유가 다름아닌 모자를 가공할때 수은을 썼기 때문인 것이다. 1720년 뉴욕은 프랑스 식민지들과 교역을 금지하였다. 이유는 가죽공급을 제한함으로서 가격하락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1791년 생도맹그섬에서 노예 반란이 시작되었다. 설탕농장주를 향한 증오로 불타는 흑인노예와 자유인 물라토(백인과 흑인 부모사이에 태어난 혼혈) 전투끝에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되었다. 물라토(mulatto)는 중남미에 사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뮬래토(mulatto)라고도 합니다. 물라토는 외모가 다양해서 검은 피부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라토는 특히 서인도제도와 브라질에 많이 분포하는데, 브라질의 경우에는 이들이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합니다. 1849년 잉글랜드에서는 200년동안 시행되면서 식민지들로부터 영국제도로 자본이 유입되는데 기여한 항해조례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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