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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otal recall 토탈리콜

by 링마이벨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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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기계문명이 이제는 벌써 파국으로 닫는것인가? 꿈을 지속해서 같은 꿈을 같은 스토리로 꾼다면 꿈인지 생시인지 정확히 모른다면 건 분명히 꿈일것이다. 자는 게 무서워 진다면 꿈이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다면 그러한 불면의 때가 조만간 올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세요? 같은자리 같은 이야기 같은 꿈 같은 환상 같은 꿈까지도 우리는 항상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이 얼마나 삭막하지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래는 사실 기술의 미래이지 사고와 생각의 미래는 아닌 것이다. 기억을 이식한 다는 것은 메타버스 가상생활을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아마도 그때를 향해서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실재와의 차이 가상과 현실의 차이 이 구분을 하지 못하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기억이 data로 변환 될 수 있는 시대로 0과 1로 모든 것이 표현돼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경험하지 않은 실재를 경험으로 인식시킬 수 있는 0과 1이 화면에 존재하는 실재로 표현돼는 시간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자아 정체감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내가 없어진 내가 사라진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나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사라진 시대에 나로 살아야 하는 부담감이 생겨 나게 된 것이다. 거울 속에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상의 오감도의 나오는 그 세상 말이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속에는 소리가 없지만 영상과 오디오는 데이타로 존재하게 된다. 0과 1의 세상은 아득히 많은데 0과1은 너무 외롭잖소! 그 외로움으로 우리는 기억을 만들고 현재와 미래 과거가 존재하지만 오늘같은 과거 과거같은 미래 오늘같은 미래들이 서로 뒤섞이고 섞여서 모든 것을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버리니 말이오! 거울속의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그 죽은 사람의 피부와 살갗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 뿐이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여! 그길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나만의 세상인 것이오! 그래도 가장 현실같은 백문이 불여일견 같은 오늘도 가짜임을 알게될때 그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현실을 통하여 나의 눈을 통하여 생성돼었는데 그 생성이 가짜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수천년을 통해서 계속돼어진 질문 " 나는 누구인가?"를 통해 현실에 대한 인식과 현실에 대한 부조리 부정합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것이 결국 분열이라면 왜 이제서야 분열을 느끼냐는 것이다. 그 누구도 미리 정해주지 않은 내 삶의 주인처럼 나를 이끄는 것이다. 내 삶이 결국은 하나의 우주처럼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사실 나를 떠나면 우리모두 하나의 객관화된 질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진실은 나를 벗어날 수 있느냐?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삶을 대할 자신감과 욕심을 버릴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사실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삶을 바라 보는 것이 아닌 내가 오늘 이 험한 산을 오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산을 걸어서 올라 갈 수 있느냐를 결정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이문제에서 평생 해답을 찾았겄만 해답은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그 현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오늘이 나에게 선물이고 나에게 해답이었던 것이다. 기억을 쓸어 담을 수 있다면 기억을 하나의 구조로 다시 재편하고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삶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이유인것이다. 0과 1의 반복추가를 통해서 내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내 삶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에대한 무수한 굼금증을 무엇을 통해 나를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역사, 철학 보리수 나무와 독실한 기도로 나를 돼 돌아보고 더듬어 보았지만 인류의 구원은 아직 제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killing code가 구원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killing code는 성경일까? 보리수 나무 밑에 있는 구원일까?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암송된 종교적 문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를 인식하는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내 어머니 아버지 나의 생김새, 나의 성격, 나의 육체적 물질, 나는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나 이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의 육신은 한 줌의 재로 하나의 디지털 code로 내 존재를 알려줄 수 있지 않았던가? 그 code가 0과 1이었던가? 나를 이루게 한 모든 디지털 신호체계의 하나로 인식돼어 온 것이다. killing code는 결국 성경이 말한 생명에 관한 평생의 의문일 수도 있고 염색체 구조 일 수도 있고 illusion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상은 현실이상도 아니고 현실같은 이상 환상같은 현실인 것이다. 환상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볼 수 있었던 환영과 다를바 없지만 환영은 분명히 현실은 아니지만 환영은 이제 너무나 정교하게 기억으로 영상으로 재 생산될 수 있는 시기가 오게된 것이다. 결국 환영은 정교하게 짜여진 가짜 모조품에 불과하고 0과 1인 그 코드를 부여해 준것이다. 결국 그 0과 1의 무한대 세상이 확대 재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진열장에 하나의 물건처럼 배치될 뿐이다. 순열이고 배열일 뿐이다.  

토탈리콜 이 영화는 이제 생각해 보니 엄청난 미래 영화였던 것이다. 20년 지나서 이렇게 실제로 역사에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SF란 영역이 이제는 세분화 돼고 있는 것이다. meta라는 영역으로 가상현실이라는 부분들은 이제 구체적으로 조금더 현실에 가까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서 지하실이 혁명군으로 또는 지하세계가 오히려 순수함으로 표현돼는 것은 이제 어는 정도 현실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기술의 발달로 공중은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들여다 보여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하 세계가 오히려 순수함의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메트릭스는 대단한 영화이고 대단히 촘촘한 미래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아주 정성이 많이 들어간 미래영화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것이 미래의 영원한 숙제요 인식됨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뇌를 reading하고 추출하고 뇌의 기억을 인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를 memory로 인식하고 뇌를 단편화하고 뇌를 읽어들여 기억을 소환하다는 것이다. 애국심과 충성심이 얼마나 하챦은 무한 반복으로 충성심과 경쟁심이 얼마나 디지털 시대에 기계적인지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적인 충성심이 얼마나 위험하고 하찮은 것인지 알아야 할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오히려 negative와 여타 다수의 이견이 존재하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새로운 가치가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이 더욱더 줄어 들 수 있는 우려와 염려로의 사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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