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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logical

남해에서(1)

by 링마이벨 2020.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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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바닷가를 간게 작년이었을 듯 싶다. 카니발을 빌려서 남해까지 더위에 차를 몰고 내려갔다. 이 유서깊은 땅에서 이 땅에 햇빛이 얼마나 강한지 아무것도 못하고 덥기만 했었는데 다시 한번 그 기억을 다시금 살리며 여러개를 생각해본다. 

"이른봄에 피는 매화는 매섭기는 하지만, 가을 서리에 피는 국화의 끈기를 따를 수는 없다." 참으로 멋있는 말인것 같다. 아마도 개혁에 필두를 세운 조광조를 두고 이이 율곡이 한말이라 하는데 이이 율곡도 내가 볼때는 붕당을 만들어 이러한 갈등에 권력을 누린 사람으로 밖에는 나도 이런 생각을 한다. 천재였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체제를 결속시키고 더욱더 붕당정치를 만든 사람으로 그것을 깨려했던 사람은 아닌 듯 하다. 

■ 김구(1488-1534)는 조선 중종 때 문신. 호는 자암. 조선 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대흥현감 계문의 아들.
김구는 성종19년(1488)에 전남 광주생. 자는 대유. 연산군 9년(1503)에 한성시에 급제했고
중종 8년(1513)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로 개혁파 조광조와 연루되어 고초를 겪음. 처음에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유배지를 옮겨
15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배생활 중 '화전별곡'을 지음. 귀양에서 풀려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배 중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 비통해 하다 병을 얻어
다음 해를 못 넘기고 47세로 타계했다. 서예의 대가 안평대군 이용 양사언 한호와 함께 조선 서예의 4대가 꼽히고 중종의 "군신(君臣)의 예가 필요 없으니 친구로서 대함이 마땅하다"라고 하고 어사주를 함께 했던 친구였을 정도였다. 

화전별곡(花田別曲) / 김구

 

 

 



 

 



 

▶제1장

 하늘의 낭떨어지요, 땅의 머리인, 아득히 먼 한점의 신선섬에는,
 왼쪽은 망운산이오, 오른쪽은 금산, 그 사이로 봉내와 고내가 흐르도다.
 산천이 기이하게도 빼어나서 유생ㆍ호걸ㆍ준사들이 모여들매, 인물들이 번성하느니,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노래ㆍ술ㆍ아리따운 여인들과 더불어 모여들었던 한때의 인걸들이,
 아! 나까지 보태어서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제2장

 하별시(河別侍)의 치자로 물들인 허리에 띤 황대(黃帶)는, 나이와 관작이 겸하여 높으도다.
 박교수(朴敎授)가 손을 휘두르며 흔드는 술취한 가운데 버릇과.
 강륜(姜綸)이 잡담과 방훈(方勳)이 코골며 자는 모습, 그리고 정기(鄭機)가 잘 마시고 먹는 모습들,
 아! 품계를 지닌 벼슬아치들이 가즈런히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하세연씨(河世涓氏)가 한시(漢詩)의 발인 운자(韻字)로서, 겨루는 시짓기인 음풍롱월(吟風弄月)에서,
 아! 운(韻)을 부르면 화답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3장

 서옥비(徐玉非)와 고옥비(高玉非)의 검고 흰 머리가 아주 다르고,
 큰 은덕(銀德)이와 작은 은덕(銀德)이는 늙거나 젊거나 서로 다르도다.
 강금(姜今)의 노래와 춤․녹금(綠今)의 장굿소리, 잘 벌었는 학비(學非)와 못났는 옥지(玉只).
 아! 꽃수풀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이기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화전(花田)의 별호가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느니,
 철석같이 굳고도 단단한 지조라 할지라도 아니 끊어질 리 없도다.

▶제4장

 한원금(漢元今)은 글로써 노래부르고, 정소(鄭韶)가 풀피리를 잘 부느니,
 혹은 바릿대도 치고․혹은 소반도 두드리고, 그 사이마다 잔대도 쳤도다.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취한 모습들을 갖추었으니,
 아! 흥이 발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강윤원씨(姜允元氏)가 스라렝딩하며 타는 거문고소리를,
 아! 듣고서야 잠이 들리로다.

▶제5장

 녹파주(綠波酒)와 소국주(小麴酒)에 맥주(麥酒)와 탁주(濁酒) 등 여러 가지 술에다
 황금(黃金)빛나는 닭과 흰 문어(文魚) 안주에다 유자잔(柚子盞)을 접시대에 받쳐들어,
 아! 가득 부어 잔을 권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정희철씨(鄭希哲氏)는 밀밭만 지나쳐도 크게 취해버리느니,
 아! 어느 때 슬플 적이 있을고.

▶제6장

 서울의 번화로움을 너는 부러워 하느냐.
 붉은 단청을 올린 지위높은 벼슬아치집 대문안, 거기 있는 술과 고기를 너는 좋아 하느냐.
 돌무더기밭 가운데 있는 띠집에서나마, 사계절이 화순하여 오곡이 풍등하게 되면,
 이 향촌에서 갖는 모임을 나는 좋아하노라.

작정 이리 저리 다니다가 충렬사 아마도 이길을 지나간 기억은 나는데 왜관이 너무 초라해 지나칠번 했던 것 같다. 이 역사적 유적은 순전히 이순신 장군의 직계들에 의해서 지어지고 관리돼어 왔다고 한다. 장군 우국충정을 알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건데 그 전시상황에 이순신장군을 사지로 몰았던 것은 다름아닌 그 당시 정치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선조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죽음의 비보를 듣고도 차일로 다시 이야기하라!고 이야기했던 선조의 그 얄팍한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역사에서 보면 이승만과 선조는 비슷한 임금이었던 것 같다. 권력에만 몰두했고 국가의 백년지대계도 국민도 없었다. 전시에 바로 한양을 떴던 야밤도주형 임금이었고 심지어는 국경을 넘어갈려고 했던 역사에 있어서 후안무치 무능력 권력형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권력을 끝까지 틀어쥐고 여러 동시대의 위인들을 죽이고 샤약을 주고 다양한 인재들을 다 소멸시키는 악마의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승만과 선조는 역사상 있어서는 안될 무능함과 권력형 비리의 표상이라 생각한다. 더 이야기 하기도 피곤하다. 

 

 

 

  • 李長坤
    (1474 ~ ?) 본관은 벽진 성종때 임용 연산군을 거쳐 중종시대까지 활약한 사람 1492년 무재가 있는 장수를 뽑는 일을 논하던 중에, 유자광이 19살 나이에 강궁(强弓)을 잘 당기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며 이장곤을 천거하여 왕 앞에서 직접 활을 당기고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495년에 생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504년에는 이극균에게 천거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의심을 받아 옥사를 겪고 고문을 당했다. 연산군은 이극균이 사사로운 일로 이장곤을 천거했다고 의심했고, 이장곤은 활쏘기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해서 천거를 받았다고 변명했지만 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이장곤은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탈출하여 행적을 감추었는데, 나중에 중종반정 때의 기록에 보면 연산군이 이장곤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해서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이장곤이 도망치자 연산군은 분노하여 이장곤의 형 이장길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잡아오도록 명령했으며, 남해 현감을 벌주고, 이장곤의 흉악함을 비난하는 어제시를 내리고, 이장곤을 잡아들이는 자는 죄인이라도 죄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극도로 분노하였다. 야담에서는 이장곤이 도주 중 지쳐서 잠이 들었고 마침 운없게도 추격한 군사들이 이를 목격했다. 그러나 이장곤은 평소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했고,특히 발이 매우 컸다. 이를 본 군졸들이 선비가 저렇게 발이 클리가 없으니 필경 그냥 도둑놈에 불과할 것 이라 여겨 지나쳤고 이장곤은 구사일생했다는 얘기. 이장곤은 모습을 감추었지만 무용과 계략이 뛰어난 사람이라, 그냥 잡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장곤이 무리를 모아 거병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런 소문이 중종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당하자 다시 나타나서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 예조 좌랑, 형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 까지 올랐다. 조광조 등의 사림과 가깝게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광조를 심문할 때 심문관으로 참석하였으나 이후 조광조를 사사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심문할 당시 조광조는 크게 배신감을 가졌는지 술에 크게 취해선 "희강(希剛, 이장곤의 자) 이 사람아!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못난 사람 같으니."며 반말을 했다고.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한 뒤인 1520년에 병을 핑계로 체직해 은퇴했다.이렇게 유배지에서 도망을 할 수동 있었다면 왜 조광조도 도망을 가지 순순히 사약을 받았을까? 그놈의 성리학이 주는 message 군신유의 뭐 이런것들이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나는 성리학이 성리학 이전에 인간들이 만들어내 학문이며 인간이 만든 하나의 규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에 오히려 사고가 얼마나 경직돼 있었는지를 알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성리학이 인내천이라는 동학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 교리를 습득했다면 얼마나 우리 학문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을까?  더 더 더 하나의 학문을 목숨처럼 받들고 그 학문의 원칙으로 수많은 사화나 당쟁을 만들기에 그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얼마나 빈틈이 또한 많았기에 숱한 적용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이렇게 쓰려져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았던가? 학문은 학문일 뿐인데... 중세 유럽의 종교전쟁은 오히려 종교로 인한 갈등이라면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으로 인한 갈등 결국 이 갈등은 학문과 종교 이전에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내 구실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김처선 

오마이갓 내시로서는 엄청난 공덕을 지닌 분으로 추측됨/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왕을 보필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죽은 뒤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고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금되어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그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 있던 "김처선"은 개명을 명령받았고, 처서 (處暑)는 '조서'로, 처용무 (處容舞)는 풍두무 (豊頭舞)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문서에서도 그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본관인 전의도 없어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또한 그의 양아들 이공신도 죽음을 당했으며 부인 서씨와 며느리를 노비로 삼았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12년(중종 7) 김처선의 행적을 《속삼강행실》에 수록하려 하였으나 환관의 힘이 세질 것을 두려워했던 중종은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1751년(영조 27) 2월 3일 나라에서 충신의 정문이 내려 그의 공을 인정하였다./ 가족으로는 부인 : 정부인 서씨(徐氏), 양아들 : 이공신(李公信)이 있었다./ 興淸/ "이 늙은 신(臣)이 4분의 임금을 섬겨왔으나 고금을 돌이켜도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사옵니다."라고 간언하였는데,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이렇게 세게 임금에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역사를 통틀어도... 

 

이극돈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 제문이라는 인용시를 성종실록에 넣은 것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그러한 인용시를 넣었는데 그 내용이라는게 초나라 왕족 의제를 찾아내어 왕위에 앉히고 항우가 천하를 제패하고 항우는 의제를 폐하여 죽여버린 것이다. 김종직은 포악무도한 항우를 욕하고 죽은 의제를 애도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정확히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을 은근히 빗대었다.라는 말은 누가 한거지? 연관성이 그렇게 있었을까? 그런데 춘추관 우두머리가 이극돈이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둔촌이집의 후손으로 8극으로 불렸다. 이집이 똑똑한 명문가로 판단되어진다. 이극돈은 김일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극돈이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전라관찰사 시절 기생과 놀아났다는 것을 사초에 기록했기에 감정이 좋지 않았었고 김일손이 이조전랑에 천거 돼었을때 이극돈이 반대로 승진이 안돼었던 엿같은 관계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오사화도 이런 두 인간의 속좁음에 의해 일어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역사의 굴곡이라는 것 피바다 전쟁도 아주 작은 이런 속좁은 애들의 감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류자광은 김일손에 원한이 있었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할때 유자의 시를 보고 곧장 떼어내어 불살라 버린 악연이 있었고 이런 유자광은 조의제문으로 세조를 욕보였다고 연산군에게 펌핑을 했고 연산군은 거기에 대노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했고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과 친구였던 정희량을 불러들여 곤장100대를 쳤다.  

 

이런사화 같은니라고 생각해보면 사화는 왕들이 권력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밑에서 지랄염병을 하면서 정치권이권을 챙길려고 했던 사람들의 세력다툼일뿐 사화는 사실 어떻게 보면 왕이 충분히 막지못한 신하들의 정쟁일뿐이다. 지들끼리 권력을 더 챙길려고 하는 요즘 2020년 정당정치와 다를게 하나도 없을 듯 하다. 통합당, 민주당말이다. 말이 당이지 사실 이합집산 이해와 이해득실만 챙길려고 하는 다수의 놈들의 있는 거지! 

연산군 4년 1498년 무오사화: 조의제문을 핑계로 

연산군 10년 1504년 갑자사화

폐비윤씨에 앙갚음 배다른 아우 안양군, 봉안군은 사약 할머니 인수대비는 머리로 받아죽임

 

연산군 12년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였다.또한 경연(經筵) 폐지·신언패(愼言牌) 실시·성균관(成均館)의 연락(宴樂) 장소화·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언문 도서의 폐기 등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각사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興淸)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녀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이에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2]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고,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의 아우들인 신수겸(愼守謙)과 신수영(愼守英) 그리고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왕위를 교체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개창 이래 장자(長子) 상속의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종반정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산군대에 공직에 있던 인물이 왕을 교체한 후 다시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중종14년 1519년 기묘사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심정김전홍경주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홍경주김전남곤심정정광필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명종 원년 1545년 을사사화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인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世間)으로부터 윤임은 대윤(大尹),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 불렸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성세창(成世昌) 등을 정부의 대관(臺官)으로 임명하는 등 일시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이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니 형세는 역전하였다. 이번에는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여 전일(前日)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소 대윤파와 사감(私感)이 있던 지중추부사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계책을 꾸몄다. 또 한편으로 그의 첩 정난정으로 하여금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좌의정 유관(柳灌) 등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서 계림군(桂林君)도 이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죽이고, 전직 주서(注書) 이덕응(李德應)을 협박, 그 무고로서 수찬(修撰) 이휘(李輝), 부제학 나숙(羅淑), 참봉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과 박광우(朴光佑), 사간(司諫) 곽순(郭詢),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 뒤 이덕응도 화를 입었다. 또 명종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봉성군과 계림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한편 사화의 여파는 그 후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큰 옥사는 이 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해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사화에서 일어난 당파의 분파는 후기 당쟁의 한 소인(素因)이 되었다. 또 훈구가 전 정권을 장악하고 사림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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