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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broken

친절

by 링마이벨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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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은 긍정적인 개념이나 실상 자세히 들어가 생각해보면 순수한 개념은 아니다. 친절을 영어로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친절은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을 한다. 갈등과 분쟁을 내포한 문화에서는 화해와 타협을 이야기 할것이고 인종갈등이 심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이야기 할것이고 소수자의 인정없는 나라에서는 소수자들의 인정해달라고 매일 집회를 할 것이고 친절이란 하나의 정치적 소산 이요 하나의 문화적 표출행태라는 생각이 든다. 친절이란 하나의 외면으로 표출화된 표현양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기의 순간에 노인, 임산부, 아이를 코로나19 백신의 차례라고 우리가 사회적 우선순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무형의 관습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어긴다고 해서 사회적(법) 처벌을 가할 수는 없지만 공정함과 보편타당함 상식의 허용범위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친절은 하나의 요식행위 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규범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에서 어떤 순위가 지켜졌는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다 친절하라고 하는것인지 모르지만 친절이라는 말에는 어마무시하다. 친하게 끊는다라는 표현인가? 상황을 통제한다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Relationship을 단절한다. 라는 말인가? 아니면 No thank you!"라는 의미를 가진 말인가? 아니면 사막에서 긴 여정을 동반할때 병든 낙타의 목숨을 끊어주는 그 총의 역할인가? 아니면 사무라이들이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의 마지막 목숨에 고통을 종결하려고 하는 마지막 한칼, 아니면 전쟁에서 고통으로 숨을 헐떡이는 병사에게 마지막 몰핀의 역할에서 나오는 그러한 개념의 단어로 인식이 된다. 어떻게 이러한 한자를 가지게 돼었을까? 이 어원은 어디서 파생됐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우리가 아는 친절이란 여러모로 다른 얼굴을 한것같다. 

 

우리가 예전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아수라 백작의 얼굴이다. 원래는 선악이 같이 있는 형태로서 인식돼었는데 어원이란 달리 선악의 얼굴이 나타나 있지 않네! 이제보니 뚜렷한 차이는 음양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의 모습이란 가장 흔한 표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개념에 밝음과 어둠이 가장 좋은 이해의 요소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다. 친절은 낯빛으로 이해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친절에는 왠지 국어에서 보면 계급과 선민의식이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적임보다는 의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된 친절의 형태말이다. 그러한 마치 인도의 카스트에서 브라만이 수드라에게 하는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쌍놈에게 했던 그러한 억압적인 배려말이다. 친절은 어찌보면 전통사회에서 과거와 현재가 단절돼지 않았을때 그 기득권 냄새가 난다. 오히려 배려가 인간적인 덕성이라면 친절은 그러한 관습적인 냄새가 난다. 왜 그런게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 단연코 하나의 결과 하나의 문화코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사회가 엄청나게 잔인했던지 혹독한 상황이었던지 친절함뒤에 엄청난 잔인함과 폭력성이 내재된 사회 말이다. 최소한 그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회 모든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明暗말이다. 동전의 양면서 균형의 좌우, 운명으로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단면말이다. 

난 항상 구토라는 것에 대비되는 문화의 단면으로 이해되는 것이 있다. 솔직함이라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부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말이다. 어찌보면 negative에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YES, 좋아요, 감사합니다." 생활속의 친절은 어찌보면 Negative 할 수 없는 사람들 그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적인 강제성이 느껴지는 이유다. 친절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사람들, 오로지 그러한 문화의 표출행태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로 친절이란 코드에서 우리가 더욱더 건강한 사회가 돼는 일은 excuse me but~ 이런 표현이 자유롭게 아무 거리낌없이 일상에서 보여지는게 더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것이 여유로울때 doing하는 것이 친절이라면 충분치 않은 제한된 condition에서 모자라지만 그 상황하에서 하는 배려가 어찌보면 진정한 친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친절이 불편한 사회로 간다는 것은 거꾸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의도가 됐든 이 친절은 우리 정치에서 필요한 하나의 manner로 자리잡길 바란다.

오히려 배려라는 말의 어원이 마음에 든다. 나누고 (교감하고) 생각하고 내가 가진것은 나누는 것이 아니고 교감으로서 정신적인 영역을 말하는 것 같다. 친절이 상황을 종결하려는 결단적인 doing 행동주의라면 친절은 정서적 교감이라는 형태로서 인식된다. 

그런데, 사회적 배려라는 말은 상당히 잘못쓰는 말처럼 느껴진다. 지극히 개별 개인의 영역을 사회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용어로서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사회 문화적인 소산으로 생각한 것이지 개인적 영역의 산물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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