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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짜장면

by 링마이벨 202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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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과 3월의 음식이었으리라! 무언가 마치고 시작할때 하나의 의식처럼 먹던 음식이었다. 졸업과 입학의 전용음식이었다. 그때 난 이 음식을 먹으면서 하는 생각은 면발이 땡글땡글하다보니 짜장이 튀지 않으려는 올굴을 음식 가까이 아주 가깝게 먹는 방법과 미리 끊어서 가위로 미리 끊어서 이 방법은 챙피해서 구지 음식묵을때 가위까지 등장하는 본거로움을 피하려고 했던것 같다. 아님 단무지 하나 위로 올려놓고 먹곤했다. 어는순간 고추가루를 짜장위에 뿌려 그 기름기를 잡으려 했는지 이상하게 배가 더부룩한 그 느낌이 싫어서 그러한 방법을 썼던것 같다. 짜장면에 탕수육포 금세기 최고의 음식조합이다. 내가 얼마나 루틴에 약헌지는 지금도 이 루틴을 깨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번쯤은 짬뽕에 탕수육 할만도 한데 오랫만에 가도 나는 짜장과 탕수육을 외치니 말이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어머니가 못오셔서 아마도 친구아버지가 사준 짜장면을 먹었던 것 같다. 동명춘이라고 동쪽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라, 해 뜨는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동쪽에서 밝아오는 빛이라는 중국집이었던것 같다. 아직도 바로 그 이름을 떠올리는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러고 얼마나 사소한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탕수육은 사주지 않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돈을 줬는데 아저씨가 중간에서 삥띠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어머니 성격으로 그렇게 남의 음식을 얻어 먹지를 못하는 입장인것이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다. 눈이 막오는 날이었는데 곱배기를 시켜 주셨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억이 사소할때 얼마나 많은 분쟁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기억이란 얼마나 편의적이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편의적이란 말은 얼마나 나의 위주로 모든것을 재편하고 편성하는지에 대한것 일 수 있을 것이다. 면을 좋아하는 중국이나 동남아 모두 보면 밥 보다는 밀을 많이 재배하고 아마도 조리의 편의성이 있었을 것이다. 조리하기 편하고 원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조건이 하나의 음식문화를 만들듯이 말이다. 그러한 편의성이 아마도 문화라는 거대한 형태로 녹아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오셨다. 가게 하느라 바쁘셨는데 읍내에 일 보시면서 오셔서 어머니랑 나는 그 짜장면집을 다시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은 듯하다. 춘천으로 유학을 가게 돼면서 어머니가 가까이 계실때 잘 못해 주어서 그런지 중학교의 졸업식 식사는 너무나 유쾌하고 너무나  포근했었던 것 같았다. 그당시 내가 좋아하던 수학선생님이 많이 나를 축하해주셨던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자전거 뒤에 수학선생님을 태우고 터미널에 자주 빈번하게 선생님을 픽업해서 터미널에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자전거를 잘 탔는데 자전거 뒤에 예전에는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스탠드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스탠드로 선생님을 모시고 터미널까지 가곤 했던 것이다. 내 아마 사춘기 처음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그 나를 살짝 잡던 그 느낌이 지금생각해봐도 너무나 좋은 느낌이었던것 같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부분이 얼마나 사소하고 대단하진 그렇게 주관적인 감정이 중요함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주관적 해석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날 내가 11월에 대형유리창을 깬일이 있었다. 대형 유리창을 깨고 그때 돈으로 5만원인지 돈이 많이 들어가서 하숙비로 대치했고 그 돈이 쓰여져서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서 인지 또한 장거리라 고등학교 졸업식은 나혼자서 친구들과 춘천에 있는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개근상장 하나도 우등상장 하나도 받지 못한 처음으로 모든상에서 제외되고 재수를 시작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때에 나의 고민은 참으로 많았었던 것 같다. 그때의 암울한 만리장성을 생각하노라면 많은 준비와 힘을 미리 준비해야 함을 단초로 생각하는 시절이다. 가진것 크게 많지않고 우울하기까지 한 내 고등학교 졸업식의 자장면을 먹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짜장면이 왜이리 긴지 끊고 끊어도 질기게 타고 올라왔던 것 같다. 인연이라는 것 어찌보면 악연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나의 가방끈 마지막인 대학교 시절 졸업식은 아마도 중국집은 아니었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오시고 형도오고 핵서 시내 한정식집을 갔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중식이 소화가 잘 안돼서 소화가 잘 돼는 음식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오셔서 처음으로 중3자취로 강해질대로 강해졌던 내가 처음으로 졸업식날 눈물이 났다. 어머니에게 고맙다고 이야기 하고 가족과 사진을 찍고 우리는 한정식집을 갔다. 여러가지 음식 엄마나 얼마나맛있게 드시는지 어머니는 별로 음식을 안 좋아하시고 많이 안 드실것 같았는데 어머니의 젓가락이 너무나도 바쁘게 그리고 너무 맛있게 드시고 계셨다. 어머니에게 이 맛있는 음식을 사드려야 하는데 하고 다짐을 하게 했던것 같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대학시절 너무나 방탕하게 때로는 너무나 계획없이 살았는데 어머니에게 많이 죄송하게 생각했던 하루였던 것 같다. 나는 알바로 번돈을 어머니 속옷 한벌 사드리고 모두 전국여행으로 탕진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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