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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용서, 고백, Confession 청출어람

by 링마이벨 202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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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백은 과거의 현재 과거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역사적인 팩트 진실마저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진실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그 기반이 없으면 우리는 것을 고백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고백은 이렇게 일방통행의 one-side 방식인 것이다. 우린 70년의 일제 강정기를 거치면서 왜곡과 비뚫어짐 왜곡 은닉의 역사적인 진실에 대해 뒤틀림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많은 살인과 약탈 배반 모략 밀정 고발과 고소거 난무하게 된다. 그것이 일본이 바라는 바였고 그들의 바램처럼 서로 물어뜯고 중상을 일상처럼 생활하였다고 생각한다. 대한 영토에서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미국에서 상하이에서 하와이에서 존재하기 위해 살기위해 서로에게 온갖 위협을 한 것이다. 내 조상이 조상들에게 마치 원수대하듯 그렇게 살아온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 아버지는 60-70 30-40 아마 그 나이셨ㄹ 것이고 지금의 우리처럼 저식을 길러야하고 살게 해야 했고 모든 위험에 헤쳐 나올수 있도록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모든 것을 걸어나오셨ㄹ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 우리처럼... 이상황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살기 위험 몸부림들이 있었을 까요?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얼마나 많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을까요? 그게 과거 였다면 지금은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을까요? 만약 형제 자매 아버지 할아버지를 죽이고 모살하고 일제에게 많은 협력을 해서 그 삶을 영위했다면 오로지 삶을 영위하고 무수한 부를 축척했다면 그 부가 그 위에서 존재 한다면 그리고 그에게 직 간접적 미필적고의에 의한 죽음이 횡횡하였다면 그 죄과는 책임은 70년동안 처벌없이 살아왔는데 지금와서... 법적인 처벌은 가능하지 않더라고 양심적인 처벌까지 자유롭지 않을 듯 하다. 누구하나 처벌없이 누구하나 양심적인 가책없이 지냈다면 그리고 그 이후로 쭉 지낼거라면 이제 그 양심이라는 영역은 아버지, 할아버지 때가 아닌 지금의 우리의 책임이요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일을 아버지의 책임을 하지만 아버지의 죄과와 허물은 덮고 그 부와 재산은 유지하고 오히려 더 축척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허물입니까? 자식의 허물입니까?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그 아버지는 지나갔다. 아들이 아버지만 못하다라는 말보다 참으로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이제는 우리때로 넘어온 것이다. 

그래서 컨페션이 필요한 것이다. 양심의 영역에서 그 죄과에 대해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를 구해야 할 때가 온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양심을 구하고 아버지의 이런 허물로 인해 폐해를 주었던 많은 사람에게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라고 진실로 사죄하고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아버지를 어머니를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명예롭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죄다. 우리가 신앙을 이야기할때 간증이라고 이야기 한다. intermission이라고 해야하나? 막과 막사이를 구분짓고 휴식을 주는 막간 휴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필요한 때가 온것이다. 1막이 잔인하고 두렵고 죽음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2막은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몸으로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 사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다. 용서를 한다고 벌을 준다고 하는 사람이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막연하게 쓰윽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막연함이란 그 거짓이란 모두 이야기 하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신앙에 대한 간증처럼 용서될 수 밖에 없고 용서해야 하는 때이란것임을 우리모두 안다. 그래서 컨페션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히려 저항하고 그 진실과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보와왔다. 아버지가 한일에 대해서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서 온몸으로 막으려 하고 돈과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막고 지키려 하고 있다. 용서가 필요한 때 우리는 용서보다는 오히려 더 갈등과 분쟁을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로 보인다. 

만약 confession누군가 신앙간증하듯이 절실하고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내 아버지의 허물을 이야기 한다면 나는 우리는 용서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 친일 인명사전이 나오고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강제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법이 고백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백은 과거의 현재 과거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역사적인 팩트 진실마저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진실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그 기반이 없으면 우리는 것을 고백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고백은 이렇게 일방통행의 one-side 방식인 것이다. 우린 70년의 일제 강정기를 거치면서 왜곡과 비뚫어짐 왜곡 은닉의 역사적인 진실에 대해 뒤틀림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많은 살인과 약탈 배반 모략 밀정 고발과 고소거 난무하게 된다. 그것이 일본이 바라는 바였고 그들의 바램처럼 서로 물어뜯고 중상을 일상처럼 생활하였다고 생각한다. 대한 영토에서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미국에서 상하이에서 하와이에서 존재하기 위해 살기위해 서로에게 온갖 위협을 한 것이다. 내 조상이 조상들에게 마치 원수대하듯 그렇게 살아온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 아버지는 60-70 30-40 아마 그 나이셨ㄹ 것이고 지금의 우리처럼 저식을 길러야하고 살게 해야 했고 모든 위험에 헤쳐 나올수 있도록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모든 것을 걸어나오셨ㄹ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 우리처럼... 이상황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살기 위험 몸부림들이 있었을 까요?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얼마나 많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을까요? 그게 과거 였다면 지금은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을까요? 만약 형제 자매 아버지 할아버지를 죽이고 모살하고 일제에게 많은 협력을 해서 그 삶을 영위했다면 오로지 삶을 영위하고 무수한 부를 축척했다면 그 부가 그 위에서 존재 한다면 그리고 그에게 직 간접적 미필적고의에 의한 죽음이 횡횡하였다면 그 죄과는 책임은 70년동안 처벌없이 살아왔는데 지금와서... 법적인 처벌은 가능하지 않더라고 양심적인 처벌까지 자유롭지 않을 듯 하다. 누구하나 처벌없이 누구하나 양심적인 가책없이 지냈다면 그리고 그 이후로 쭉 지낼거라면 이제 그 양심이라는 영역은 아버지, 할아버지 때가 아닌 지금의 우리의 책임이요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일을 아버지의 책임을 하지만 아버지의 죄과와 허물은 덮고 그 부와 재산은 유지하고 오히려 더 축척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허물입니까? 자식의 허물입니까?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그 아버지는 지나갔다. 아들이 아버지만 못하다라는 말보다 참으로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이제는 우리때로 넘어온 것이다. 

그래서 컨페션이 필요한 것이다. 양심의 영역에서 그 죄과에 대해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를 구해야 할 때가 온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양심을 구하고 아버지의 이런 허물로 인해 폐해를 주었던 많은 사람에게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라고 진실로 사죄하고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아버지를 어머니를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명예롭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죄다. 우리가 신앙을 이야기할때 간증이라고 이야기 한다. intermission이라고 해야하나? 막과 막사이를 구분짓고 휴식을 주는 막간 휴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필요한 때가 온것이다. 1막이 잔인하고 두렵고 죽음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2막은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몸으로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 사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다. 용서를 한다고 벌을 준다고 하는 사람이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막연하게 쓰윽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막연함이란 그 거짓이란 모두 이야기 하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신앙에 대한 간증처럼 용서될 수 밖에 없고 용서해야 하는 때이란것임을 우리모두 안다. 그래서 컨페션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히려 저항하고 그 진실과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보와왔다. 아버지가 한일에 대해서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서 온몸으로 막으려 하고 돈과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막고 지키려 하고 있다. 용서가 필요한 때 우리는 용서보다는 오히려 더 갈등과 분쟁을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로 보인다.  만약 confession누군가 신앙간증하듯이 절실하고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내 아버지의 허물을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모든것을 제쳐두고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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