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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앙리 마티스 '춤'

by 링마이벨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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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그 자체로서 좋다. 그냥 춤을 춘 후에 그 후련함이 좋다. 춤은 표현중애 촤고의 가치로 여겨진다. 몸을 쓰고 마음을 쓰고 손발을 쓰는 모든 신체기관을 쓰는 종합적인 표현의 끝판왕이기 때문이다.

남자1명 여자4명 이러한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는 장면 아닐까? 난 춤은 재즈 연주라고 생각한다. 창작과 자율 자유로운 마음이 몸으로 표현돼는 것 춤이 격식과 옷을 입는 순간 춤은 춤이 아니라 생각한다. 술자리가 파할때 쯤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어깨동무하고 마지막 여흥을 즐기던 우리의 파괴 그때 브레이크를 출때 그 잠재의식에 있던 춤을 끌어내어 춤 사위를 하던 그 유쾌함은 차라리 학습돼지 않은 파괴 그 자율로 우린 넘 행복해 했다.
우리는 왜 춤에 집착할까?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한이 많은 민족이라서 이제 우리의 한은 K-Pop으로 진화했었다. 춤은 무의식의 표현으로 유난히 흥이 많고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디지털의 속성을 미리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관계 지속성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의 디지털에서 아니면 엔터테인먼트에서 주도권을 가져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수세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관계는 생명이고 희망이고 보람이고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본정서가 이 작은땅에 많은 민족이 서로 얽키고 얼켜 외침을 받아 오면서 이러한 관계 지속성을 더욱더 발전 싴켜 온 것이다.

우리의 한은 기본정서가 돼왔다. 한은 곳곳에 배어서 내려왔다. 지금까지도 소월이 시에서 그랬고 우리의 역사가 고대사든 근대사든지 간에 우리의 빨치산이 그랬고 태백산맥이 그 역사를 지켜보고 지켜 온 것이다. 누구든 그 감정을 가슴에 받아들인 것이고 그 감정이 우러나온 것이다. 춤도 바닥에 고여있는 감정의 진수가 남아 있기에 우리는 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왜 인류는 dance를 추기 시작했을까? 춤은 아무래도 주술의 성격이 분명히 있었다. 하나로 이어주는 bonding을 위한 결국은 지키기 위해서 좀더 많은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하나로 모여 강력한 message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춤은 주술로 바램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을때, 그 두려움을 맞서는 방법은 오직 맞서지 않는 방법을 숙지하는 것이다. 일찍 자연을 위로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죽음을 피해가기 위해 자연의 분노에 제사 지내고 위로하는 제사를 관장하는 하늘의 이치를 풀이하는 사람이 그룹댄스를 즐겨 좀더 그 제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춤은 사실 그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몰입의 가치를 중효하게 생각했던 그때 말이다. 춤은 이상향을 보게하고 춤으로 환상의 경험 끝에 도달하게끔 하기위해서 춤은 상당히 많은 집중을 하게 했다.

가을 하늘에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제주 돔나이트 별이 빛나는 밤에 하늘에 돔이 열리는 경험을 돔이 열리는 것을 실제로 보았던 적이 있을까요? 걸그룹 군무처럼 춤이 고 난이도로 접어들고 상업적인 것과 결합하여 은밀함을 그렇게 잘 표현했던 적이 없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나이트에 도입한 그 사람도 대단하지만 가을하늘에 하늘밑에서 춤추는 우리들이 더 재밌어 보인다. 타인에게 playing은 나를 위해서도 이지만 실은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가수의 기능이 노래에 집중돼었을 때 노래보다는 춤과 보여지는 부분으로 공략해 지금의 기술적 trend를 예상한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매니지먼트의 사업을 진행했던 매니지먼트의 예지력이 대단해 보인다. 그 예지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예능산업의 기초가 될 수 있었든게 대단해보인다. 수백 수천의 언어보다 한번의 몸을 쓴 것이 그 춤을 통해서 어쩌면 우리의 사랑과 그 내밀한 욕망을 가장 잘 Public하게 표현할 수 있는 표현방법이 바로 춤이었던 것이다. 흑인들이 재즈에 대해서 현실의 핍박, 억압을 자유로움으로 표현해냈듯이 우리의 불편한 감정들을 우리 조상들은 노래와 춤으로서 비틀어 즐겁게 표현해 냈던 것이다. 자유스럼과 역설까지도 자유자재로 반대로서 아니 모든것을 표현해 냈다. 소월이 혁명적이고 우리의 춤이 혁명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이다. 현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춤이 혁명과 다른점은 혁명은 피를 불러왔고 춤은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가끔은 관능적일수도 있고 표현돼어져도 오히려 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또는 관종할 수 있는 표현의 방법중 가장 내밀하고 거침없는 표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춤은 Progressive하고 혁명적이다. 춤은 표현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나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춤이 발달한 사회일 수록 아마도 감정을 좀더 드러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를 가진 문화권이지 않을까? 아니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를 표현하지 못하니 춤으로라도 나를 드러내보자! 라는 가치관 나는 오히려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춤을 여럿이 어울려 춤추는 문화가 아닌 Private한 개인의 춤으로 많이 드러내 보이는 단체가 돌아가며 추는 춤보다는 개인의 표현이 주가되는 문화양식말이다. 뇌피셜이겠지만 아마도 그래서 우리의 클럽에는 유난히 개인룸이 많은 것인가? 왜 구지 나이트클럽에 룸이 그렇게 많은지는 나도 잘 이해가 돼지 않는다. 아마도 나이트클럽에 가 춤도 추지 않고 아마도 다른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의 반증인가? 참 여러가지 생각이 나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클럽문화는 오히려 젊은이 들일수록 춤으로 가고 나이든 나같은 경우가 룸을 가는 것인가? 어른들은 왜 룸을 틀닭들은 왜 룸을 갈까? 은밀함이 좋아서 챙피해서 흑심을 품고 있어서 !

왜 신혼방을 문창호지를 찢고 들여다보았을까? 왜 시골이어서 볼게 없어서 보여줄려고 동네에 놀거리들이 충분치 않아서 마지막 동네사람들을 위한 퍼포먼스 였을까? 유난히 못살고 이러한 문화적 남용을 허용한 우리의 문화가 너무나 왜고돼 보일수도 있다. 아니면 Lesson Pro~~였을까? 어찌 할 수 모르는 많은 후배들에게 조교 역할을 한 것인가? 문화적 포용성과 그 범위는 끝도 없어 보인다. 우리의 문화적 포용성은 대단해 보인다. 아니면 집단적 주술의식이었을까? 동네가 단체적으로 그러한 Doing을 하는 날로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한편으로는 생각이 든다. 왜 구지 이러한 폐쇄적 성의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창호지를 뜯고 볼수 있게 하였다는 건 한편으로 얼마나 왜곡된 모습의 한 형태로서 비춰보일 수도 있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한 사회가 가지는 수용성의 척도로 자유로운 사상과 인간의 보편타당한 성격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상식이 주를 이루는 사회말이다. 다같이 중요하고 존중돼고 그런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말이다. 이러한 상식은 우리삶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돼어 왔던 것이다. 상식은 아마도 사회를 움직이는 주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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