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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변화 그 개똥이라고 여기는 것

by 링마이벨 202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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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처럼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있을까? 불변의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는 예들을 살펴보자! 불변을 이야기 하는 것 진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 우리가 절대적 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랑, 진리에 대해서 하나만을 이야기하고 어떤 원칙과 다수의 principle을 이야기 하는 거이 있을까? 내가 종교가 없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나외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원칙들은 여러가지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원리 유일신을 이야기하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며 종교간의 old와 new로 다시 자체적으로 신을 섬기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위배될때 그들은 다른 사람, 또는 내부의 다른 원칙, 또다른 섬김으로 그들끼리 또는 다른 사람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내부의 규율을 위해 엄청난 살인과 혹독함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최초에 인류는 자연을 숭배했을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토템은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즉 거대한 변화를 이끌었던 자연 비, 눈, 산, 해와달이 주는 변화무쌍한 기후의 힘, 자연의 거대함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에 그들이 주는 무지막지한 강건함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인간 스스로 생사를 반복하면서 생기는 인간자체의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 누군가 이러한 질서를 만들고 이러한 자연의 창조물을 만든이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이 신앙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사와 정치가 하나로 움직이고 과거부터 반복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정치의 수장이 되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하늘의 기후를 알고 그러한 반복을 거치면서 제사는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화되었으며 그러한 섬김은 얼마나 의미를 가지고 종교라는 기본적 토대를 얼게를 만들었을 것이다. 추측일수도 있고 다른 많은 종교적 지지자들이 불만을 가질  수도있지만. 그 수많은 정치적 이슈가 발생할때마다 오한 얼마나 많은 이권들이 정치적 이슈들과 결탁돼었을까? 이러한 이권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불럿을지는 그 수많은 전쟁을 생각하면 될것이다. 종교라는 것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중세때 행해졌던 이단이라는 것에 대해 처절하고 잔인하리만큼 광범위하게 치루어졌던 폭력들에 대해서 수많은 죄없는 생명이 종교적인 이유로 종교가 믿어하는 그 진리에 대하여 반하는 주장을 했을때 과학과 문화 문명에서 행해졌던 수많은 처절한 단죄를 기억해야 할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post-corona19가 만약 중세 흑사병처럼 중세 콜레라처럼 그때 행해졌다면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까? 지식이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인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기술과 문명이 발달했을지라도 그 구간에서는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는 구간에서는 반드시 그 두려움에 상응할 수 있는 대체구간이 생긴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들이 생겨난다. 그게 백신일 수도있고, 그게 종교일수도 있고 종교는 더욱더 탄탄하게 이러한 모든 두려움에 대한 극복을 기도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종교라는 것은 더욱더 많은 기회와 극복을 할 수있는 장치로 대치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에 코로나로 여러가지 통제를 하더라고 종교쪽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는 사실은 그들의 집회가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그 기회로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라는 것 CHANGE, 변화를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마도 변화가 권위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몇천년을 하나의 원착으로 지배될 수 있다면 그 원칙은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하게 논리화 교리화 돼었을까?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더욱더 필요해지고 구체화가 필요하지만 종교자체 요인에서 발전하게 돼는것도 사실이다. 사실 요즘 종교적인 야망을 가진이가 종교라는 이유로 팔로워를 데리고 그러한 짓을 일삼는 이도 있는데 일부의 행태로 이야긴 하지만 상식과 종교자체의 원칙과도 무관하게 하는 짓을 보면 많은 한탄을 자아내게 한다. 왜이리 종교가 정치적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지나온 몇백년간 가지고 온 여러 관습이 그 해답이 될듯하다. 왜 종교가 그렇게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도 여기 존재 하는 것이다.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종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오로시 그당시 유학자들사이에서 퇴락한 사대부 중앙으로의 진출이 막힌 양반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받아들였을거라는 것은 불응 보듯 훤하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에서 철저하게 인간의 평등과 권리를 이야기 했으니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이란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왔을까? 명나라 청나라 받들듯이 이 문화 사대주의는 몇천년을 이루어 놓은 그러한 결과의 선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에 종교가 없었다면 믿음과 쉴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더 비참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2000년 3000 년을 내려오면서 종교는 종교 나름대로의 너무 침 이란 로직을 형성해서 공격받은 소재를 다 없애 있다고 생각을 한다 거짓으로 부터 의 공격 그리고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한 공격 그런 로직과 그런치 내부에 치밀함이 오히려 종교를 더 부패하게 했을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칼과 방패 예 놀리 말이다 그러한 놀리에서 종교 스스로 얼마나 내부적으로 변화에 대해 형하고 사람들의 요구 예 붕 했는지는 아마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천 년을 거슬러 내려온 어떤 경전은 대한 어떤 경외심 그런 어떤 조직에 대한 무 조항 숭배 이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종교라는 것 변화라는 것 하물며 인간의 의복이 발전 하듯이 수천 년을 걸쳐 내려오면서 종교 라는 것은 그 옷을 갈아입은 저기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신랑임도 아니다 더구나 신앙을 지지하고 신앙에 대한 어떤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종교를 아직도 가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고 내가 신앙을 가질 종 되었던 양심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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