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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들

논리철학논고(나의 답)

by 링마이벨 2019.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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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본질적인 것은, 어떤 한 사태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에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의 질량은 무엇일까? 나의 존재는 나의 무게는 나의 나이는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의 질량 나의 이름 나의 양복 나의 사고 나의 사상 나의  삶은 어떤것으로 나의 성격은 무엇으로 이루어 졌을까? 나의 평가는 누구의 평가이며 나의 사람됨은 누가 평가 할 수있는 사람됨일까? 나의 이웃, 나의 동료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존재는 누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일까? 결국은 나의 존재는  나 외에는 없다. 나외에 나를 평가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 그런데, 나를 사랑함이 나만한 존재가 없건데 어떻게 나의 존재를 내가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떤 구성요소로 어떤 원인으로 어떤 존재로 나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본질은 결국 나로 말미암은 아주 근원적인 나의 존재의 원인이며 사물의 본질은 그렇다면 사물의 존재원인이고 사물의 존재원인은 한 사태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본질들이 서로 연결돼어 잇다는 것인데 본질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어떤 예가 될까? 가족의 관계 혈연과 의무감 희생의식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가족의 관계나 가치를 생각하면 본질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꽃이 아름답다라는 본질의 이야기는 수천만년을 지나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듯 하다. 꽃의 본질=아름답다 꽃만아름답다는 시대를 지나고 누가 관여를 해도 꽃의 아름다움은 지속되는 것으로 보면 구성요소가 되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논리란 상당부분 인과관계와 여러가지 사건에 연결돼 있는 것이다. 논리란 너무나 치밀해서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마치 우리문화에서 돼지 한마리를 잡으면 머리면 머리 꼬리 다리 몸 껍데기 어느것 하나 머리는 법이 없다. 논리란 온전한 돼지 한마리를 보는듯하다. 어느 것 하나 필요없는 것이 없다. 사족이 있었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퇴화한 흔적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논리란 헛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에 아무리 막 쓴글처럼 보일지라도 다 쓰고 지우려면 지울 수 없는 논리와 똑같아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논리는 내가 쓴글은 삭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내머리속에 명확한 논리와 순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논리란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 치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우면 지울수록 우리의 뇌의 문제인지 실제적으로 논리의 허약인지는 모르지만 지우면 지울수록 약해져 가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나의 뇌가 나의 후퇴를 상당히 부정적 사인을 주는 것 같다. 이처럼 논리라는 것은 치밀하고 막 쓴것 같지만 우연적이지 않고 내 뇌의 사고의 흐름을 가장 정교하게 반영하는 것 같다. 결국 우연이란 것은 우연이란 말외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치밀한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후에 필연적인 상황과 걸맞게 되면서 우연으로 보일것이고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바깥에서 시간적 대상들을 시간 밖에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는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 정신과 육체를 표현하는 말인지 들숨과 날숨의 이야기인지 시간과 공간도 돼겠지만 물과 공기라는 H2O 화학식에서 수소분자 2개와 산소분자1개를 생각할 수 있다. 물이라는 부분에서 수소2개와 산소1개분자를 개별적으로 있는 수소2개와 산소1개분자는 떨어져 있으면 물이라는 물로 변환될 수 없기에 그 둘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면 물이 되는것이랑 비슷한 원리로 이해 될 수 있다.

사물은 그것이 모든 가능한 상황들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 자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의 형식은 사태와의 연관형식 즉 비자립의 형식이다. 

사물의 관계가 자립적이다라는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베스킨라빈스다. 조건중 냉동이 유지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노랗고 빨갛고 한 아이스크림이지만 반약 그 온도의 조건이 맞추어 지지 않으면 그저 색깔염색한 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자립이란 말은 대기에서 아이스크림하나로 존재한다면 아이스림은 금방 녹아서 대지위로 뿌려져 바로 증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온도가 철저히 유지되어야 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립이란 형식은 냉장고 안에서 온도가 유지되어질때는 자립적인 상황이고 온도가 유지돼지 않는 냉장고 밖 상황에서는 비자립적 상황인것이다.    

내가 대상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사태들 속에서 나타날 가능성들도 전부 알고 있다. 

이문장은 상당히 비약이 심한걸로 비춰진다.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것을 다 알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 현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존재를 알고 있다라는 질문으로 이해되기 쉽다. 안다고 해서 모든것은 다 알고있다라는 말은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내가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이해와 오해는 벼로 차이가 멊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것이 얼마나 많은 책임을 이야기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대상을 알기위해 내가 그 대상의 외적속성들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대상의 내적 속성들은 모두 알아야 한다. 

외적속성과 내적속성을 모두 알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 했으니 말이다. 외적속성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내적속성들은 모두 알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 했으니 말이다. 바깥과 안쪽은 어디를 경계로 만들었을까? 어디를 이야기 하는 걸까? 바깥과 안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지향하는 바 목적을 삼는 이유가 안과 바깥중에 어딘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서로의 추구하는 바와 목적하는 바가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대상들이 주어진다면 그와 더불어 모든 가능한 사태들도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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