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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broken

아버지

by 링마이벨 202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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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사실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란 더더욱 없다. 존재에 대해서 기억나는 일이 별로없다. Episode라 할것도 없고 하지만 희미한 기억하나로 안방에 붙었던 작은 방안에 우리는 윗방이라 불렀는데 거기서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불도 키지 않고 이불을 덮고 누워 계셨다. 오로지 내이름을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하나이고 마지막기억이다.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항상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족이라는 가족역의 병에 아버지가 있었다라는 것을 기억하며 병으로 소환해내곤 한다. 내 어린시절 기억말이다. 아마도 그때의 아버지나이에 머물게 되면서 불현듯 아버지의 서늘한 기억들이 소름돋듯이 올라온다. 내아이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에 가끔 산소를 데리고가서 할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지만 연결되는 것이 없다보니 별로 할 말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으셨고 딸만 세명을 낳다가 아들에 딸 마지막아들이 바로 나인것이다. 아들을 원하시던 분이라 매번 딸을 낳을때 아버지의 실망이 많이 컷다고 한다. 으레 딸을 나은 날에는 여지없이 밖에서 많은 술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고 한다. 언덕너머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시는 아버지를 누나들이 나가서 어깨동무를 하고 모시고 오신고는 했다고 한다. 그 아버지의 노래가락을 어머니는 많이 좋아하셨던 것 같다. 30년대 태어나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 당시에는 흔하던 욕 한마디 손지겁 하나 안 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내가 결혼할때 그 때 아버지가 이러셨다고 이야기하실 때는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하시곤 했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로 흔치 않으셨던 모양이다. 흰 고무신에 광목으로 만든 두꺼운 바지와 하얀셔츠를 즐겨 입으시곤 하셨다 한다. 둘다 이북에서 피난와서 살던 강원도에서 두분이 만나 가족을 이루었고 삶을 공유하신 것 이었다. 아버지의 모델이 없다는 것 보고 배우고 role model이 없다는 것은 살면서 부닥치는 큰 어려움중에 하나일 것이다. 살면서 그 어려움이 나에게는 너무도 절실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이해가 될듯하다. 그때 그 아버지는 이랬을 것이라는 추측과 그 추측과 더불어 어떤 어려움과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의 무게 세월이라는 것은 철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절대 이해할 수도 없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유난히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것 자전거에 형과 큰누나를 태우고 다니시는것을 좋아했다는 것 말이다. 그당시 자전거가 흔치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달리 동네에 형을 태우고 자랑을 하러 다니시는걸 좋아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형이 잘 생기고 아들을 낳아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동네마실에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시는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같으면 위궤양 이런건 병도 아닌데 그당시에는 상당히 어려운 손쓸수 없는 병이었으니 원주기독교병원에서 할수있는 조치를 다 하시다 집으로 돌아오셔서 죽음을 맞이하셨던것 같다. 아버지는 장남으로 술도 워낙많이 드셨고 노래도 좋아하셨고 엄한 시부모 밑에서 어머니와 그러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셨다는 것을 어머니는 지금도 자랑하듯이 말씀하신다. 없던 시절 가난한 시절 그래도 아버지를 믿고 시집을 와 행복하게 사셧던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추억하신다. 지금도 기억할 수 없는 가난한 시절에 행복했었다고 진짜로 행복했는지 그건 모르겠다. 진짜 행복하셧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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