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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폭탄주

by 링마이벨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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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영화적 상상력에 대해서 옳고 그른 도덕성의 도마에 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듯하다. 아마도 맥락을 빼버리고 어떤 장면에 대해서 시시비비는 얼마나 무익하고 편협한 것일지 모른다. 아마도 이런 논쟁이 왜 시작됐는지 발단을 보면 아마도 공중파 tv의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장면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눈살이 찌푸려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불쾌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한 민족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냥 문화적 수용성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바른 민족이어서 그럴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 불편할까? 왜? 

부모로서 살아가는 모습 , 삶의 치열한 모습과 욕망과 그 어두운 단면들이 주마등처럼 겹쳐져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내 자식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까? 아님 그러한 영화의 단면이 내 삶의 단면들과 너무나 sync율이 높아서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듯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불편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부모로서 좋은 모습, 좋은 면, 유난히 긍정적인 면들에 의존을 많이 해서인지 모르지만 부정적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문화적 부정적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넘 착한 민족이다 보니, 실제와 영화에 대한 상상력을 분리시키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투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의 나와 상상 속의 나를 분리시키지 못하는 결벽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착한 사람이라서 그 착한 사람을 너무 정치적 해석을 많이 한 터라 그리고 남북한 긴장의 삶에 또는 일제강정기를 거의 직접통치외에 한 70년 남의 눈치를 보다 보니 과다한 몰입과 해석 또는 감정이입을 해 객관성과 주체성을 많이 상실한 듯 보인다. 

그냥 함 웃고 넘어가면 돼는데 그 편안함은 어디에도 볼 수 없을 듯 보인다. 그토록 두려워하는 실수라는 것, 실패라는 것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실수를 실패를 너무 죄악시해왔다. 사실 실수라는 것에 대해 포용성과 수용의 훈련을 하지 못한 것이다. 

감시와 조급증 불필요한 관심에 많이 노출돼었던 것이다. 앞으로 미래에 필요한 상상력이 용인되는 문화적 습관이 형성이 안 되었고 감시와 조급증은 문화를 빠르고 신속하도록 긍정적인 촉매제가 돼었으나 깊이가 있는 문화적 수용성을 위해서는 어떤 발전도 진전이 없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글도 써놓고 보니 그러한 판박이다. 폭탄주를 거시기로 때려서 폭탄주를 먹는 모습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 안하고 문화가 어떻고 역사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나 또한 답답한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뭐가 옳고 그른지에만 집중해 논란만 키우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시하면 되는데 누가 뭐라던 무시하고 쌩까면 되는데 이러한 관심을 키우고 미디어에서 갑론을박하는데 한 획을 더해 사족을 붙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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