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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Place

제주도

by 링마이벨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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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외지인이 방문한 사람들중 두사람이 있었다. 첫째는 불노초를 구하러 온 서불이었고 그 다음이 하멜이었다. 시간대로 보면 서불은 진나라때 사람이었고 일본나가사키의 동인도 회사에 직원이었던 하멜이 제주에 표류한것은 1653년 이었다. 1653년이면 효종때 표류해서 훈련도감 벨테브레의(조선 귀화한 박연)의 훈련도감아래에 두어 북벌정책에 쓸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멜상선전시관

 송환을 원했지만 강제로 구류하여 1666년 9월 4일밤 8명이 탈출 13년 28일만에 탈출하게 돼었다. 어찌보면 문화적으로 포용하는 문화적 태도를 배워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엄청난 학대와 모질게 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대우를 잘해주고 말대로 북벌의 모양새로 쓰였다면 대한민국은 또 다른 문화적인 강국으로 또는 실제로 그 이후에 일본애들에게 그 처절한 강정기를 거치지 않았을테이고 지금까지 그 여파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사실 그 당시 실학파의 거두들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목적만을 내세우고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예의와 존중을 못했던 우리의 지식인들의 근시안적인 태도가 결국은 그 이후 불행을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멜보고서는 문화적인 가치를 논하기 전에 동인도회사에서 하멜이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 쓴 하나의 보고서였던 것이고 1917년 육당최남선이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에 연재 돼었던 것을 국내 '청춘'이란 잡지에 게재 하였고 1936년 '진단학회'에서 다시 발표 1939년 '하멜표류기'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서복전시관 

  아마도 불노초를 구하러 온 서복은 정방폭포로 가는 길에 있다고 한다. 서불은 서복이라고도 하는데 진시황때 유명한 방사였었다. 서귀포 정방폭포 앞에 서복이 다녀갔다라고 하는 글씨가 남아 있는데 '상주리 석각'으로 불리는데 확실하지는 않은 듯 하다.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한자로 이야기 하면서 서불이 여기를 지나갔다라는 뜻으로 이해 한다. 이러한 글씨가 남해거제와 해금강에 동일 글씨가존재 한다고 한다. 西歸浦라는 한자의 어원도 서불이 돌아갔다라는 이름이 기인한다고 한다. 불노초를 가지러 2000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남녀 중국의 뻥은 알아줘야 하지만 항상 너무 크고 너무 많아 의심을 사지만 누가 본사람이 아직 살아있지를 않으니 믿어야지! 맬 정방폭포앞에서 멍게에 소주를 먹던 나로서는 이번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글자를 보고 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여정은 유홍준 선생님이 이야기한  루트를 밟아 보는 것이다. 해남을 몇일 가야 하는데 현실여건상 책을 읽어본대로 해남여행은 어려울듯해 아이들 데리고 제주도에 그동안 다른 여가를 즐기느라 보지못한 것들을 많이 보고 와야겠다. 맬 지가 프로선수도 아닌데 골프만 치고 휑하니 돌아온 여정을 바꾸어 보아야 가족에게도 면이 설듯하다.

다음은 어딜까? 사계리 4계절을 모두 다 볼 수 있어서 사계리라 했을까? 기암절벽이 무지 대단해 보이는데 말이다. 나는 이 해안 沙溪海邊아니구나 모래해변이 있어서 이구나! 가끔 우리에게 한자어가 없었으면 세종대왕님한테 미안하기는 하지만 말이지 그렇게 한자어를 많이 아는것도 아니지만 한자어로 국한문 혼용해야지 이해가 빨리 돼는 나이가 된건지! 그때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사항인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실제로 모래해변이 자갈과 어울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겠구먼 사진으로 판단해 보면 말이다. 그러나, 모든 현장에 가면 에이 이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너무 몰르고 어디든 그림만 생각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engagement가 없기 때문이다. 사물과 나와의 연관성이나 약혼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사물의 진짜 의미가 나에게 다가오는데 맬 한번 보고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나는 story-telling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려니숲길

그해 여름에 나는 머리가 무지 아플때 제주를 찾아 맨발로 사려니 숲길을 걸은 적이 있다. 약간 빨간 황토를 지나 족탕도 지나고 약간은 습기가 많아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길을 걷고 나서 많은 힘을 얻었을때였던 것 같다. 축축함이 많기도 했지만 한여름 숲에서 나오는 그 신선함을 얻고 걸어나기엔 너무나도 좋은 길이었던 것 같다. 주차장이 부족해 주차하느라 고생은 했지만 길은 너무 좋았었다. 숲길을 산책하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고 맨발로 걷기에는 잔 돌들이 많아서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책하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장소였던 것 같다. 겨울에는 눈밭에 차를 대고 함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겨울은 가끔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숲의 모습을 보기에는 적당한 계절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역시 우리는 눈 보다는 비가 오히려 나아 보였다. 

눈밭길을 걸으면서 사실 설산은 가까워지면 가까울 수록 눈이기 때문에 눈은 멀리서 감상하기가 나아서 그런지 몰라도 가까이에서 보는 눈 밭은 그저 눈 밭으로 밖에는 인식이 돼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인지 너무나 한산해서 약간은 적막한 느낌까지 들어버렸다. 그 적막함이 한편으로는 너무나 외로워 지는 느낌까지 들어서 나는 약간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느낌이 나아 보인다. 사려니는 제주도어로 숲안이라는 뜻이란다. 어떻게 말이 이렇게 이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려니 사려 살 하여간 말이란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문화는 이토록 지식인의 눈에만 보이게 했을까? 우리의 문화재는 문화재로 문화로 보려는 노력은 안 한지 오래돼고 오로시 역사로서 보이기 위한 하나의 허례허식으로 문화를 인식하다 보니 역사시험에서만 그치는 그러한 행정을 아직도 뒷바침하고 있는 형국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문화에 그 흔적들에 존재하는 스토리를 읽을려면 아마도 내 밑천이 드러나고 나의 일제 강정기 나의 오류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다보니 얼마나 많은 헛점들이 보일까? 그 헛점이 내게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를 합리화 하려다 보니 지금껏 그 병폐가 세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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