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연안이 어떤 동네이길래...
옌안은 중국 마오의 장정의 종착지이자 강정기 일본에 대한 중국의 저항 지역의 본산이었고 역사로 보면 이민족의 땅이었다. 1935~1948년까지 중국 혁명의 근거지였다.
"내가 체험한 인생살이의 큰 윤곽을 그려볼때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뼈를 깍는 아픔속에서 얻어낸 패배의 연속일 뿐이며, 앞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빡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지가, 나와 인간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왜놈보다도 친일파란 놈들에게 더욱 화가 났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우익을 이용해 대중운동을 막아보려고 했다. 3.1운동이후 일본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것 같다. 조선유학생이 그리 많았던 부분도 그래서이고 대개는 인력거를 끌었다. 일본에서도 유학하는 학생들사이에 구별이 있었다. '달걀 껍데기'또는 '뜨신집 아이'라 칭하였다. 나는 계급적인 증오, 민족적증오, 개인적 증오, 국가간의 증오를 수없이 많이 봐왔다.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잔인함이 더이상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승리에 자극되었고 패배로 각성하였다. 잔혹성을 띠지 않는 어떤 역사적 변혁이 일어난다면 커다란 감명을 받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끝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압록강을 건너 하얼빈 행 기차를 타고 700리 도보여행을 해서
상하이에서 만난 안창호와 이광수는 민족주의자의 쌍벽으로 이름난 사람들이었으나 이광수는 변절을 했꼬 이광수는 사이토총독의 초청으로 조선에 돌아와서 <동아일보>와 청소년을 위한 잡지인 <동광>의 주필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이러한 노래를 좋아했다니 미더지지가 않네! 흑인들의 영가는 아라무래도 좋아할 이유가 있기는 허네! my blue heaven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 연습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되었고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사진찍기를 아주 좋아하였는데 언제나 이번이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라는 생각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또 그들은 공원을 산책하기를 좋아했고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
영화에서 보면 이들이 사진찍기를 좋아한다. 라는 표현처럼 마지막에 암살하러 가기 Dday전 사진찍는 장명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들도 그들의 일상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들은 원래 강인해 전혀 미동치 않을 것 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들도 일상이 있고 자기 목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었겠는가? 인간적인 묘사나 필치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약산 김원봉은 상당히 미남이었던 것 같다. 빼어난 용모를 가졌다 하고 톨스토이에 유낞히 심취에 있었다 한다.
가장 뛰어난 2명의 조선인 테러리스트로 김원봉과 오성륜이었던 것
김성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정신적인 스승
한위건도 김산과 반대돼는 의견이었지만 훌륭한 운암 김성숙은 김산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1916~18년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성숙(星淑). 운암은 1919년 3·1운동때 경기 양주(楊州)의 광천시장 시위 주모자로 체포돼 1년간 복역했다. 1923년 중국으로 넘어가 ‘창일당’을 조직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반제동맹에 가담했고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중·일전쟁 이후 우리나라 항일광복운동의 우파인 김구계와 좌파인 김원봉계 통합에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통합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했고,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인간인성의 변화야말로 인간본성의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님 웨일스가 기록한 〈아리랑〉에서 김산(본명 장지락)이 혁명가의 전범으로 꼽은 사람. 1910~20년대 한국은 물론 소련, 중국, 일본을 활동 무대로 삼아 항일투쟁과 혁명에 몸을 던진 민족주의자이면서 국제주의자. 혁명이 있는 곳이면 수천리 길을 마다지 않아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박진의 본명은 박근성(1887~1927)이다. 여느 혁명가처럼 그는 박영, 박응세, 박근성, 박몽각, 박성남 등 많은 가명으로 불렸다.
그는 1927년 12월 중국공산당 탄압에 나선 국민당에 저항해 광저우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에 참여했다. 여기서 6일 밤낮을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그가 이끌던 한국인 60명을 포함한 200명의 돌격대는 영남대학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16살 소년 한 명(안청)을 빼고 몰살당했다.
박영은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10대 후반일 무렵 경흥 일대는 항일투쟁의 주요 무대였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 등장하는 의병부대 ‘사포대’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항일운동을 지원하던 그는 1908년 7월 일본군 경흥수비대가 의병들의 공격을 받은 뒤, 의병을 도왔다는 혐의로 아버지와 함께 체포돼 고문을 당한다. 옥문을 나온 뒤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0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 지린성 허룽현으로 건너간다.
이듬해인 1911년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 도쿄로 견문을 넓힌다. 메이지대학에 다니며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깨우친 그는, 신해혁명으로 수천년 봉건질서가 뒤집혔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허룽현에 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을 벌인다. 나중에 봉오동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던 그의 교사 이력은 러시아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된다. 박영은 1917년께 난징 금릉대에서 한 차례 더 견문을 넓힌다.
1919년 최진동이 만든 군무도독부의 참모장이 된 그는 이듬해 도독부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통합하면서 생긴 대한북로독군부 통신과장을 맡는다. 이 부대는 같은 해 6월 치러진 ‘독립전쟁 1회전’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대대를 맞아 15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거푸 대패한 일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1만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한다. 3690여명이 학살당한 경신참변의 시작이다. 1920~21년 수천명의 독립군들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다.
러시아 10월혁명으로 촉발된 내전이 한창인 연해주에서 그의 세계관은 크게 변한다. 연해주로 넘어간 독립군 상당수는 적군(혁명군) 및 러시아 빨치산들과 함께 연해주의 백군(반혁명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 그도 그런 와중에서 볼셰비키당원이 된다. 그는 1921년 12월 인스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독립군 지도자 김규면은 “박영은 부상한 채로 그냥 싸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듬해 부대를 이끌고 7차례의 ‘블라디보스토크 해방전’에 참전한 박영은 크게 다쳐 이만(현 달네레첸스크)으로 후송된다. 그곳 조선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그는 1923년 러시아 극동민족소비에트 위원에 이어 주석직에 오른다.
하지만 내전이 끝난 뒤 러시아 등에서 한국인들로 구성된 고려혁명군은 가치가 떨어지면서 무장해제를 당한다. 이때 독립운동가들은 소비에트 건설에 헌신하는 게 조선 혁명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쪽과, 러시아혁명이 완수됐으니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간도나 조선으로 가야 한다는 쪽으로 갈렸다. ‘조선혁명 우선론’을 내세운 이들 중 일부는 분파주의자로 몰려 소련 공산당에서 쫓겨난다. 그도 그때 중국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다른 혁명’을 찾아 1926년 아내, 두 동생과 함께 광저우로 간다. 당시 광저우는 쑨원의 국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 함께 어우러져 불타는 용광로였다. 70여명의 한국인들은 조국 독립을 위한 징검다리를 놓기 위한 또 하나의 혁명전쟁에 참가하려고 연해주에서 광저우로 이동했다.
박영은 중국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 된다. 그러나 이듬해 장제스가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공산당원과 한국인 혁명가 수백명이 검거된다. 이를 피해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로 옮긴 그는, 12월에 ‘삼일천하’로 끝난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 봉기에 참여해 활약한다. 그러나 일본군 등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민당군과 군벌군의 반격으로 봉기가 실패해 퇴각 명령이 떨어진 것도 모른 채 4일 동안 진지를 고수하다 동지들과 함께 살육극의 제물이 된다.
지난달 13일 ‘동쪽 제방에서 돌격대에 참여. 주강을 건너 적을 공격하다 영남대학 부근에서 숨졌다’는 옛 기록을 달랑 들고 그가 숨진 곳을 찾아 나섰다. 삶이 다할 때까지 독립과 혁명을 위한 싸움의 맨 앞에 섰던 박영이 쓰러진 곳에는 핏자국은 없고 수십 층짜리 아파트와 고급 빌라만 줄지어 서 있었다.
그는 광저우에서 만난 김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 평화는 단지 고통일 뿐이다.”
광저우/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