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다른 종교에서는 없었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 예수가 못박혀 돌아가셨는지 우린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신을 믿던 안 믿던 그건 일반사람이 볼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실제 종교인들에겐 매우 중요한 일일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종교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신화같은 이야기를 everyday 믿어버리고 기독교가 가지는 rhetoric중 "예수를 믿느냐? 세번 물어볼것이고 부정할 것이다."라는 레토릭은 최고의 가설과 논증으로 보인다. 의심하는 행위를 가장 사악한 행위의 하나로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몇 천년전에 말이다. 사실은 어찌 보면 그 강요받은 믿음에 대한 의문과 문제제기를 너무나도 우습과 사악한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만이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만이 가장 주관적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오는 회의와 의심이 실제로는 무신론자가 될 수 있음을 우리가 아는 대개 2개의 명제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대한 답을 할려면 결국은 신을 믿었던 그 신뢰와 믿음에서만이 신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으로 귀결 지을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다소 맹목적인 다수의 본당에서 의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은 실제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므로 본당에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엄격히 통제되는 쾌락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분방함이 위주가 되고 우리의 감정으로 모든것이 결정되는 그러한 리벌럴한 방식이 아닌 상식이 지배했던 2천년의 가치와 그 가치를 함부로 의심할 수 없는 신뢰 그러한 신뢰들이 쌓이고 쌓여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 국가권력과 그 체계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system이라는 것이 결국은 누군가 만들어 놓아서 무임 승차한 그 체계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맥주는 즐기되 알코올이 없는 걸로, 엄격히 통제되는 쾌락의 시대 진짜 쾌락주의자는 흡연과 약물중동자 입니다. 흡연에 대한 사회적인 강박은 증상입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담배 피우는 이는 갱스터이거나 신은 없지만 신은 너무 자주 우리에게서 나타난다. 쾌락을 즐기는 것은 사실 쾌락을 멈춘 사람에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문제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쾌락은 너무나 흔하게 우리가 유지시키고 그 전체적인 시스템을 떠받히고 그러한 체계를 존중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체제는 사실 그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듯이 보이지만 우리는 아무도 없는 빈 껍데기에게 경외심을 바치고 존경의 모든 마음을 받치는 것처럼 보여진다.
산타클로스 이야기 아시죠! 부모님들에게 물어보면 "부모님들은 산타클로스 이야기 믿으시나여! 당연히 안믿지만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샀죠!" 이야기한다. 반대로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 아뇨! 아빠가 사온걸 알지만 모르는 척해요!" 무슨 상황일까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1인칭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데 크리스마스에 선물 사는 것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무슨 상황일까요? 이 상황은...우리 스스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웃어주는 기계라는 겁니다. 예능을 틀면 방청객 웃음소리가 나고 내가 웃는 것마냥 편해지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불교사원에 가거나 교회에 가서 원하는 것을 기도하고 소원을 빌고 당신은 지속해서 음란 마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누군가 믿어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가상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종교가 주는 좋은 점도 있지만 종교가 주는 폐해 또한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