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김약연 주도로 북만주 화룡현 명동촌에 세워진 한국의 민족교육기관
그러면, 김약연은 누구였을까? 1868년 9.12~1942. 10.29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함경북되 회령출신, 시인윤동주의 외숙부이다. 여동생 김용과 매제 윤영석
사이에서 출생한 시인 윤동주는 조카로 외숙부인 김약연이 설립한 명동학교를 졸업했다. 1900년 간도로 이주했다.
어떻게 보면 완전 국경지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네! 아마도 백두산 줄기니 산으로 경계면이 있을테고 1900년데 가족을 데리고 이주를 했으니 아마도 경계면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말과 우리말을 유창하게 같이 썼을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마도 처음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지금 중국에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저땅은 지금 우리랑도 무관하지 않았을 테고 아마도 우리 민족의 일부 들이 발해때부터 명백을 유지하며 살지 않았었나 싶다. 1906년 폐교된 서전서숙을 계승하여 1908년 서전서숙 졸업한 김학연이 세운 민족교육정신의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돼면서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 이동녕, 여조현, 정순만, 박무림, 왕창동은 해외 한인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각지역 학교를 설립하였다.
어찌보면 실패한 자주권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실패하고 해외롤 눈을 돌려 민족의 백년대계를 꿈꾸던 곳 서전서숙이라는 곳이 그 뿌리가 아닐지 모른다.
김약연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사는 국사에 황의돈, 윤리에 박태환, 한글에 장지영등이 초빙되었다. 1911년에는 여성의 교육 필요성을 역설하여 정신태, 이의순, 우봉운등이 취임하였다. 아마도 위의 사진은 그 여학교 입학식 아니면 졸업식 장면일지 모르겠다. 참으로 역사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기존에 서선서숙이 초가로 돼있다면 명동서숙은 서양식 기와이었나 보다, 기와의 양식이 가지런히 정리돼어 있으며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1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하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일제 강정기에 간도에서 이러한 자주적인 교육으로 그 만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사진으로 보면 아주 멀리서 이 많은 사람과 건물을 다 들어가게 찍었으니 얼마나 눈물 나는 일이던가? 이 사진을 찍기위해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이 건물앞에서 렌즈를 맞추고 이 많은 사람을 남녀 공학인데 4:1정도 남자가 많은 비율이구나! 이때 벌써 여성들의 교육이 저렇게 시작되었다니 이 또한 얼마나 놀랄 일인가?
이사진을 보면 20년동안 상당히 말기로 예측할 수있다. 여성의 수가 상당히 위에 사진보다 많이 늘어나 있음을 알 수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절이었지만 사진 하나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운데 하얀 옷은 이상설 선생인가보다! 130만원 들여 학교를 지엇다니 자본은 얼마나 촘촘히 그리고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를 볼수 있을 것 같다. 졸업생들이 어마 무시하다. 민족이름이라는 이름의 기치를 걸고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 정신과 얼이 살아 있었을까?
지금은 이렇게 돌만 덩그러니 예터가 남아 있으니 복원을 한다면 예전에 느낌 예전의 사상들이 남아잇는 것으로 이돌을 보고 예전에 문화적인 토대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마는 그나마 이돌로 위로 받고싶을 뿐이다.
이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진하나로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있다. 그때 그들이 역사의 굴곡에서 무엇을 했는지?
1905년 8월 미국대통령을 무슨자격으로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이
이 한장의 사진이 여러가지를 이야기 해주고 잇는 것이다.
미cia기록문서 말이 필요없다. 그런데 문화적 뿌리는 현재 연변에서 이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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