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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AGE

by 링마이벨 202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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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여러개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상처와 영광 나이테는 그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나이테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시는가? 갯수, 빛깔, 두께, 간격 혹시 당신도 나이테를 보면 세고 싶은 본능이 생기시나요? 몇살이지, 몇년을 지내야 이러한 외양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나이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가진거라 생각하는 것으로 판단이 드는데 그 의견에 동조하시나여! 

가끔 우리는 존경이라는 Respect라는 표현을 씁니다. 요즘 존경이란 말은 드물기도 하지만 존경을 이야기할때 어디서 우리는 그 존경을 목격할 수 있을까요? 희극인이 원로 희극배우를 보며 느끼는 존경, 그것은 한분야 본인이 생각할때도 본인이 어려워하는 그 삶의 굴곡을 지나온 한 인간에 대한 설움과 자기연민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삶이 하나의 코미디로 희극인, 어찌보면 정치와 권력으로 모든것을 경험하고 자기로 돌아와 삶을 마친 한 인간으로서 보는 존경심은 자기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마도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 

그렇다면 이분의 경우는 어떨까? 남사당패를 쫓아 떠돌이로 희극인으로 사회자로 아직도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예능프로그램에 몇년전 까지도 나오셨던 이분은 무엇으로 존경하는 것일까? 힘들거나 슬프거나 즐거우나 그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공간 개념으로 보면 그 공간의 한켠을 지켰던 것이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Space 개념으로 공간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어떠한 것이 그 믿음과 그 굳건함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적인 것은 시시비비 있을 수 있으나 어떤 공간을 나무처럼 한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나무를 존경하는 것이다. 만약 패였다면 그러한 존경은 없을 듯 보인다. 

그러면, 왜 요즘 우리는 세대차이에 Gap Difference에 엄청난 시기와 갈등에 직면하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존경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존경할 대상으로 생각해본적도 없고 존경하라고 사회가 가르쳐 줘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근대에 해방후에 우리는 누구를 존경할 수 있을까? 우리를 respect할 수 있을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노무현, 문재인 심지어 우리는 아무도 존경하지 못하도록 존경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역사적인 진실도 재갈을 물리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도 다른 기준과 잣대를 밀어넣어 누구하나 바른 평가를 내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아직도 국사라는 과목에 현실을 반영못하고 과거 방식대로 역사를 평가하는 잘못된 방식이 비일비재하다. 한번도 역사앞에 떳떳하지 못하는 인물들과 그 인물을 정파적 이해와 이해득실을 찾아서 FACT마저도 철저히 왜곡하는 사람들 이것은 우리는 1945년에 역사로 단죄하지 못한 결과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애국자와 변절자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편의주의에 의해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들과 그 무리들고 인해 신문이, 언론이 미디어가 교과서가 사실을 왜곡하고 그것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하에 어영부영 컸던 아이들이 이제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부정에서 이제는 그 부정이 선한얼굴로 바뀌었고 아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실상을 모르고 그 부와 그 편익에 의해서 이제는 그 아이들이 세상의 주체가 돼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실은 한 낯 편의점 일회점 용기처럼 편하고 익숙해져서 아무런 후회도 편견도 비판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들이 보기에 기성세대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공방이란 그저 꼰대들의 틀닭놀이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근대에 보여주었던 40년대 이후 태어났던 기성세대에 이줄은 얼마나 불편하고 쓸데없어 보였고 심지어 무능력자로 보일 수 있었을 듯 하다. 이 불편함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게 줄이었고 특권이고 그게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권력으로 어디부터가 권력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생활에 도처가 다 권력인것이다. 이 생활의 불편한 줄을 탈피하기 위해 또다른 줄이 필요했고 낙하산이 필요했고 가장좋은 장소에 낙하애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즉 꽌시(중국)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줄을 유지할려면 평상시에 관리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관리가 바로 금권이고 '약'을 친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도 관리비용이 들어가는데 이러한 관리가 대한민국에도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까지 선생님들의 '촌지'가 사라진다라고 이야기 하지 못하고 촌지가 진화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난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주 이상한 상황들이 발생했습니다. 만약 줄을 이렇게 잘 섰지만 촌지문화는 뿌리깊이 가지고 있는 MZ이라면 이것은 또 어떨까요?  MZ세대는 오히려 권력지향적이지만 철저히 권력이 없을때는 포기한다는 겁니다. 있으면 쓰지만 없으면 바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생존을 위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했다면 이제 MZ세대는 나의 편안함과 안위를 위해서는 바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떨어짐을 또한 철저히 SNS상에서 비틀어 버리고 해학을 가합니다. 그것이 MZ세대가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MZ세대는 더욱더 capitalism으로 빠져 들어갔을까요? 원래 탐욕스러워서 아니면 원래 자기밖에 모르는 세대들이라서 !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키우고 우리가 만든 우리의 아바타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경쟁'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경쟁이다 보니 경쟁의 Definition으로 친구도, 가족도, 구성원모두가 경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경쟁자일뿐이고 내가 쉬는 동안 적은 공부해 내 영역을 파괴하거나 내 자리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들이 가진 유일한 친구이자 재산인 Digital의 속성은 모든 중간과정을 무너뜨렸습니다. 코로나 이후 삶처럼... 친구도 거래를 중간에서 조절해 주고 역할을 해주었던 모든 대상자들이 심지어 부모들도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감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죠! 한번 가속도가 붙으면 그 이전에 속도에 대한 감응이 너무 느리게 느껴지고 너무나 한심하고 어이없게 느껴지기 때문인거죠! 결국 속도에 대한 숭상이 그 빠름이 만들어낸 허상에 속아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동굴속에 보았던 디지털이라는 세상이 준 그 허상에 지속하여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마치 마약처럼 함 하고 지속적으로 모든 문화의 가치 모든 세상의 요소들을 불필요하게 번개롭게 생각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 허상으로 불나방처럼 달려들 수 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구나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조선시대 선조가 누렸던 한번도 땅을 밟아보지 못한 우리의 아이들은 심지어 전시조차도 세상에 대한 이해는 모두 SNS상에서 이해했던 세상으로 이해하다보니 모든것이 더욱더 어려워 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아이들과 아버지들의 어머니들의 대화는 어디로 갈까요? 대화를 해보지 않고 혼자 밥먹고 학원다니고 혼자 공부하고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주체적인 방향성조차도 없다보니 이해도도 많이 떨어지는것으로 보입니다. 대화해 본적도 없다보니 이해는 더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지요! 결국 대화가 안돼고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이 Gap Difference의 주요 요인입니다. 이러한 대화의 이해의 부재는 당연히 모든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갈등요인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지요!

사실 언어적으로 보면 10대들이 가지는 기성세대의 불신은 이제는 관심을 벗어난지 오래됐습니다. 이제 그들의 흡연문화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언어적인 특성으로 보면 사실 말을 많이 줄여쓴다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알아듣는 것도 불쾌하고 무조건적으로 다 줄여쓰는 그들의 언어적 특성이 오히려 이해가 됨즉하다. 결국은 언어적으로 비하와 줄임말은 사실 전통적인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못알아듣고 알수없게 하는 비속어 문화와 다름없다고 본다. 왜 그들이 그렇게 변하였을까? 그건 고민해 봐야 한다. 한번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지못한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문제의식도 없었고 심지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었으니 우리는 그저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부터라도 사회문제를 청소년 문제, 교육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필요해 보인다. 무조건 기성세대의 틀을 맞추는 것은 문제 해결방식이 아닌것 같다. 

 대치동문제 학원보다도 거대한 Academic 폴리스로 만든 우리의 교육제도의 문제를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모든가정의 교육비가 대치동으로 다 빨린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사실 대치동은 우리의 교육제도를 함 들여다보고 과감하게 어디부터가 문제인지 한번 뒤집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인 셈보다는 문제라면 미루는 것 없이 먼저 손을 써야 할 것이다. 

내아들은 아닐지라도 따스하게 말해주는게 말할 수 있는 문화로 간다는 것 모든것이 가족중심의 문화를 혈연지연을 탈피할 수 있는 길을 문화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렇치 않고서는 누구를 위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게 자본주의로 가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현상이라도 그것을 탈피할 수 있는 초자연적 방법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을 가져야먄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 이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명확하지 않다.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 관심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나는 치열한 경쟁사회 치열한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면 어느정도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교육적 해결방법이 모든것을 벗어날 수 있는 공통분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지만 말이다. 교육이 그 시작이고 그 끝이라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교육 손도 안돼는 교육 말고... 

나이는 양보의 수단이 돼어왔다. 이득도 편리도 물론 연장자의 획득을 위해서 나이가 쓰여졌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 승리의 전유물로 더불어 나이가 어리면 존중이 없어도 큰 문제가 돼지 않았던 사회였던 것이다. 존중도 배려도 없던 시대의 산물 그 수단이 나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들어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서 정정당당하게 업무량과 일을 해왔다는 것이 아니기에 사실은 나이라는 것은 편리함을 얻기위한 보편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편리함은 때로는 너무 일방적이어서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거기에 따른 불필요한 희생이 수반돼었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젏은세대들이 짊어지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와서 존경은 아주 큰 권력자 자기의 생존권을 의사결정할 수 있는 아주 소수와는 잘 지내지만 나머지 세대와는 철저하게 반목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다수의 갈등상황이 발생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갈등상황에 기성세대는 오히려 나이로 인해 직장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오리혀 의사결정소수가 이제는 나이를 기성세대를 내쫓기 위한 구실로 오히려 구실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세대갈등과 더불어 기성세대는 직장에서 내몰리는 신세가 된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기성세대 또한 mz세대와 다를바없이 앞선 선배들에게 착취와 인권유린을 한번도 이야기 하지 못한 상황에서 착취의 당사자로 인식돼어 버린 것이다. 어쩌구니 없는 상황이 된것이다.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대화와 해결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인것이다.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있는 업무를 철저히 기성세대의 힘을 빌어 탈피하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좀더 새로운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실질적 업무와 거기에 맞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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