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정치화란 말은 참 낯선 개념이었는데 오늘날 한국을 보면 이처럼 명징하게 이해되는 대목도 없지 않다. 배제와 전복은 아마도 상징과 실재가 낳은 차이로 인한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형이라고 이야기하기로 한다.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사회현상에 대해 객관적인 정의와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들의 어젠다들이 실재적으로 증명을 마치지 않은 상태로 디지털이라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뉴스소재로 쓰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과거 우리가 지녔던 소문의 진상을 이제는 영상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나름 객관적으로 포장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종편이 그동안 해온 방식을 일반사람들의 logic으로 발전되어서 확산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시나리오라는 영역에서 확산되고 나름 하나의 가설로 등장하는 것이다. 나 같은 시골출신이 시군구에서 놀다가 서울에 들어와 하나의 정형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 불가능을 전제로 전면화하는 것이 바로 무엇일까? 불평등하다는 진실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이다. 불평등과 불가능 참 logic 재미있기는 하다.
만약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처럼 코로나의 비대면의 매력은 상당하다. 잠재적인 실직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것을 구직으로 내용을 감싸기도 하고 아마도 그건 커다란 사회사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비대면이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편리한 도구로 사적인 개별화로 분자화 도구화되는 개인을 느끼게 된 것이다. 왜 삼성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디지털 회사들이 왜 아직도 코로나 때의 업무 시스템을 아직도 지속해서 쓰고 있는지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아마도 상시 회사의 인력구조를 감축할 수 있는 논리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현상 '코로나'가 실현시킨 것이다. 자본의 논리앞에 개인이 얼마나 도구화되고 단편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나는 생각한다.
시간 시간에 대해 직장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시스템이 문제가 많고 직장이 얼마나 더 현실적으로 변하는 일조를 한 것 같다.
마치 좌우가 세상을 대변하는 모든 가치기준의 양분인 것처럼 도식화 하는 사회 그 도식화를 통해 이윤과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있어서 이 세상은 양분하는 의미가 있다. 어떤 도덕적 기준을 할 때 옳고 그름으로 양분하는 것처럼 시소를 탈 때 시소를 타서 올라간 사람과 땅을 딛고 있는 사람만 있고 그것을 주변에서 보는 방관자와 지나가는 사람의 가치는 사라져 있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 세상이 그렇게 양립할 수밖에 없는 공간인 것처럼 호도하고 그 프레임을 즐기고 이익을 얻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싸워야 이득을 보는 사람들 말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에서는 너무나 순수한데 반대편에서 보면 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바로 그 논리의 중심이 바로 이익이 발생하는 구간인 것이다.
좀 더 나를 돌아보고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최근 조사회사에서 많이 쓰는 말인 'SHY'란 말이 난 우리만 쓰는 단어인줄 알았는데 이번 트럼프 선거전에 미국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 듯하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과감하지는 않지만 양극단이 만들어 내는 정형의 이데올로기처럼 느껴지는 사회 문화 현상에 대해 적절히 다른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SHY말이 내가 볼 때에는 SHY=SELFISH라는 말처럼 들리고 "selfie가 나를 드러내는데 내가 나를 스스로 찍는 사진"이란 말처럼 나를 대변하고 남과는 다르지만 다수와 무리가 형성돼 있지 않아서 수줍게 내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라 나는 칭하고 싶은 것이다. 가끔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다수의 무리에서 그룹의 개념에서 말할 수 있는 다소 개인주의고 개인의 이익을 적극적 대변하는 반이데올로기적인데 민주적이라는 말에는 부합하지만 다수의 논리에서는 상당히 후순위에 있는 논리를 말하는 사람들 그 무리를 '샤이'라 난 칭하고 싶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선거는 크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나를 대변하고 나의 이익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회를 성큼 성큼 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