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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들

역사인물 조광조

by 링마이벨 2017.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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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경에 국오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

사림의 사상적 중시조, 나아가 조선시대 유교적 경장주의자들의 정신적 사표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는 효직(孝直)[2],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종시절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반정공신들이 앉힌 왕으로서 실권이 약했다. 반정공신에겐 연산군의 폭정이 그것도 신하가 주동이되어 반정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컷다. 중종의 전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지속적인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조광보의 옥사와 중종4년엔 왕실의 종친들이 연루된 옥사가 있었다. 문제는  논공행상(論功行賞)모순이었는데 바로 유자광같은 자가 공신으로 책봉된것이다.

 **유자광: 전라북도남원출신관료, 최고의 간신 , 서자이면서 병조참지 자리에 올라던 이정도면 조광조와 비견이 될정도다.  

개국공신으로 독서에 유달리 집중한 그는 사림파의 혁신거두로 개혁을 꿈꾸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배향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현광과를 설치하여 등용을 정리했으며 소격서를 폐지한 논란을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남곤과의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추후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했던 했던것 같다. 정치문제 발생시 남곤이 비인간적으로 냉정하게 가혹하게 할것을 미리 알았던 것 같다. 결국 정치를 하면서 그 끝을 보게 된것은 남곤과 그의 일파와 정치적인 의견이나 여러 정책의 반대자로 결국에는 죽음까지도 파멸하게 된것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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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결국은 이 의식이 조선 전체의 사회문화를 장악하게 되면서 그 불필요한 죽음, 파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죽은자를 위함이 산자를 지배하는 주요의식이 주요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 하단 말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중심이 아니고 그 죽은자를 위한 의식으로 삶을 장악하고 삶까지도 파멸시키는 주요논리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결국 조광조의 변화와 개혁이 그 후로 일어날 무수한 정쟁과 삶과 죽음을 분할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 하단 말인가?
 조광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러한 정치적 플레임을 걸었다는 것 홍경주와 남곤이라는 반대세력의 작전에 걸렸다는 것얼마나 내부적인 반대에 걱정을 덜 했던 것 같다. 너무 중종을 믿어버린 탓인가? 결국왕이라는 총애가 그 믿음이고 그 믿음에 너무 믿었던 것 같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 

" 홍경주, 남곤, 심정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아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주청한다.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李耔)·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10] 11월 16일 옥에 갇혔다.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10]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5]"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5]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현종 8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다. 적려유허비는 후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된다.

적려유허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관련 이미지


결국 이러한 역모는 조광고가 실시하려던 위훈삭제의 성격이 구세력들을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신의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해 훈작을 받은 사람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舊)세력을 제거하고 신진 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무려 126명으로 이 숫자는 조선의 개국공신(45명)이나 이후 발생한 인조반정 때 공신(53명)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후에 중종도 공신에 대한 재조사를 명했는데 그 숫자만 70명이 넘었다. 조광조 일파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해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해  전면적인 물갈이를 하려 햇던 것이다


조광조 '絶命詩'

愛君如愛父 (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근심처럼 하였다.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밝은 해 아래 세상을 굽어보사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내 단심과 충정 밝디 밝게 비춰주소서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뒷메에 엄기는 약을 언제 캐려하느니.

 

'김굉필(金宏弼)이 무오사화로 희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시다.

때마침 그곳에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조원강(趙元綱)을 따라간 17세 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광조(趙光祖)였다.

그가 태어난 곳이 구름재(雲峴) 기슭. '땅이 질퍽질퍽한 고개'라는 뜻이다.

구름재의 한자 '운현'(雲峴)과 '니동'(泥洞)의 합성어가 오늘날 '운니동'(雲泥洞)'이다.

구름재 기슭에 태어난 개혁의 풍운아가 한점의 구름처럼 사라졌으니 '구름재'(雲峴)란 땅이름을 탓하랴!

조광조생가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광조의 생가터 운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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