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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by 링마이벨 2019.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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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명당을 후에 해석을 가미해서 그러하겠지만 원래는 누구나 쉽게 나의 살곳을 살피기 위한 아주 필요하고 생활적인 지침들이었다. 복잡하지도 않고 그저 지리, 생업조건, 인심, 산수가 그것이다. 현재의 집짓기는 살기위한 집이 아닌 돈벌기위한 집이다 보니 햇빛과 물 공기 여러가지가 무시돼어지다 보니 지하, 반지하등 경제적 요건에 맞게 살다보니 집은 그저 사람을 위한것이 아닌 돈을 모으기 조건에 절대적으로 충족돼어진다. 

공간

공간은 분위기를 닮아간다. 어떤 공간에서 사느냐는 사실 크게 풍수나 지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공간은 얼마나 주변을 품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이 분위기의 공기 이 대지의 사람들 이 공간을 스쳐가는 사람들 이 공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 이 공간의 수많은 text들이 이야기 돼어지고 상상이 돼어지고 그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등을 상상하고 실제로 우리는 그 공간을 스쳐간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단층은 먹고 마시고 잠을 자는 세가지 행동에 집중돼 있다. 마시는 것이 먹는것이 주식이 될 수도 있지만 먹고 마시는 것이 공기라면 물이라면 입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면을 대하고 있냐는 것이다. 내가 마주 대하는 면이 이차원구조라 본다면 나는 주관적이고 내가 대하는 풍경은 이차원적인 면인 것이다. 내가 삶이 볼수 있는 위치인 것이고 내가 대하는 면이 이차원적인 우리가 미술관에서 나를 제외하면 주변은 작품이듯이 삶은 작품이지만 철저히 객관화되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정지돼어 있는 듯하지만 쉬지않고 고여있는 강가나 저수지를 보듯 시간은 그 정지된 면으로 흘러간다. 너무나도 무섭게 빨리 그리고 에누리 없이 시간은 그 정지면을 물 수제비 뜨듯이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숨을 쉬는 이공간이 아주 삶과 어떤 연관성도 없이 무료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궤적을 정확히 가로 질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무의미한 이 단편적인 activity들이 모이고 모여서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이 공간은 내 삶이기도 하지만 나의 전부이기도 하다. 

우리의 이 공간은 물, 흙, 공기로 대개는 채워져 있는 것이다. 왜 우린 흙을 중요시 했을까? 먹는것도 아닌데 예부터 우리의 흙은 우리의 먹을 것을 담는 그릇의 주원료이었고 내가 밟는 신발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맨발로 밟는 흙은 방의 확장성을 가졌기 때문에 아마도 먹고 밟고 하는 주 활동의 요소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그릇을 만드냐에 따라 그 먹는 용기의 주재료였기 때문에 흙은 아마도 중요한 요소가 돼었다. 그 흙을 만드는 주요소가 바로 흙을 갤때 물과 그 흙을 만들었던 공기는 삶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지나쳐도 중요시 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삶을 이루는 기본요소고 가장 중요하고 치열한 역사의 한 투쟁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좋은 땅, 좋은 공기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도 불사했겠고 역사적으로 국가들이 좋은 물가를 좋은 흙과 풍경을 얻기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을 했을지는 가히 상상히 될 듯하다. 이에 우리의 지명을 들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지명에 우리의 삶이 투영돼 있는지는 지명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물의 역할은 기본적인 마시는물에서 그 영역을 확장해 간다. 물이 잘 관리돼어지고 물이 고대로부터 로마에서 씻는 문화 즉 더러운 것을 씻는 세정제로서의 물이다. 악을 지워가고 대개는 피를 씻어가는 역할 들을 하지만  잘못 관리돼면 역류가 돼어 인간을 그 더러움의 자체로 끌어들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욕탕문화를 보면 마지막으로 욕탕문화는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의 역할들을 하지만 만약 그 욕탕문화가 필요이상으로 커지다 보면 그 사회가 그 국가가 망조가 들어가는 사회로 비추어 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적인 것이 public하게 이루어진다면 결국 그 사회는 망해가는 것이라고도 최근에 유럽에서 벌어지는 public sex라는 것이 사회풍속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사회현상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사회는 어쨌거나 좋은 일만은 아닐 듯하다. 왜냐하면 사회현상은 철저하게 그 사회를 모체로 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도 근거없이 발생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역류되는 사진을 보면 우리가 우리를 감추고 깨끛하게 살려고 지냈던 지하의 물이 지상으로 역류된것이다. 결국은 우리을 힘들게 하고 우리를 추악함과 민낯으로 대하게 하는 것이다.

이물과 강물이 어떻게 다르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수에 넘쳐나는 물과 이물이 똑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같은 물인데 왜냐하면 그 하수구물이 흐르고 흘러서 이 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같은 물일수도 있고 증발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물은 결국은 우리의 몸을 채우기도 하지만 우리를 씻어주고 우리를 더러움에서 우리의 흔적들을 지워주는 역할을 하며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물이 강이돼고 바다가 될 수 있는 물인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물에 대해 단순히 화장실 변기를 채웠다고 그물이 더럽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결국에는 우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은 대를 위해서 보자면 어떤것도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다를 수 없다가 오히려 나을듯 해 보인다. 

가장 은밀하지만 바다를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다를 ...변기에 있지만 바다를 상상하고 언젠가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70%라는 숮자 아마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숫자인 것이다. 우리의 몸에 수분의 함량과 우리국토에 대해 물이 차지 하는 비율의 숫자인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러면 땅도 몸도 전체적으로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70%의 물이 필요한것이다. 대지를 적시고 대지의 수분을 공급하고 대지의 원활함을 위해 물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물은 결국 우리의 피의 흐름이라고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을듯하다.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물도 같은 물이긴 하지만 물이 어제의 물이 아니듯 시간도 어제의 시간 한번도 정지해 보지 않는 과감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과 물은 한번도 같은 물이 아닌듯 해보인다. 시간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반복돼거나 같은 상황이 한번도 없는 것이다. 그 시간을 지나면 이미 모든것은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한번도 같은 적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김정호 대동여지도를 들어보자 어떻게 그 당시에 이렇게 펼처서 그릴 수 있는 감각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쉽지 않았을 듯한 다니지 않으면 그리지 못하는 그림이지 않을까? 이 발품을 다 팔았다는 말 아닌가? 이 한땀한땀을 걸어서 이렇게 총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니 얼마나 안스럽고 부러운 일일까? 

  

진짜로 산맥이 하나로 다 연결돼 있을까? 왜 산맥은 하나로 연결돼 있단 말인가? 태백산맥하나의 줄기아래 수많은 산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호기심이 일어나는 말인가? 이 산맥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과 긴밀하게 연결돼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체의 부분을 엄청난 실핏줄과 정맥들이 에워 싸듯이 그위로 피를 실어 나르듯이 우리의 국토는 백두대간과 정맥에 비유한 것이다. 풍수는 가끔 필요이상으로 부풀어져 가끔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부관참시를 하는 기준이 돼기도 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들은 무엇이었을까? 물 흙 공기는 사실 크게 검증이 돼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은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로서 말이다. 분위기이었던 것이다. 

만조천

 용산미군기지를 통과하는 만조천의 예를 한번들어보자! 미군기지가 들어서기전 여기는 일반 민가가 많던 곳이다. 그곳에 사람들이 살던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여기에 유독성 물질이나 기름덩어리등을 버린곳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300m오픈된 천변에 미군이 아마도 지금까지도 통제도 돼지않고 지금까지도 하나의 치외법권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천이란 것이 망가지고 없어지면서 제 역할을 못하게 돼면서 많이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자연도 만약 그 쓰는 사람이 제대로 관리안허고 못쓰면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 강산도 관리 못하는 후손이 돼면 그나라 꼴이 이 천과 똑같이 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은 애초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돼어있지만 물은 소나기에 비와 변기에 물이 넘치는 여러가지 삶의 애환이랑 연결돼 있고 흙은 정원에 시체를 파묻은 좋은 경관에 그 흙으로 묘사돼어지기도 한다. 물이 만약 과거를 씻기 위한 기폭제로 작용돼어진다면 흙은 끊임업이 과거를 덮기 위한 오브제로 그 재료로 사용이 돼어지는 듯하다. 

나는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의 대들보가 하는 역할 과거 우리의 집은 인간을 담기위한 그릇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릇 가장 나를 나답게 만들기 위해서 그 안에서 인간미가 인간을 담기위한 노력이 보였다면 요즘의 건물은 그저 사생활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많이 집중돼 있어 보인다. 마치 지하라는 공간이 지상의 모든 더럽고 어두운 것을 지하에 감추고 있듯이 공간이 철저하게 비인간적인 요소로 묘사돼어지는 것이다. 가리고 감추고 또한 어둡고 어지러운 것으로 말이다. 그 공간이 인간을 담지 못하고 인간을 비 인간적으로 만드는 공간으로 지상의 불필요한 모든 어둠, 모든 불필요함, 번거로움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지하는 지상을 받치는 재료로서 지하가 아닌 그저 숨기기 위한 요소로서의 지하 말이다. 오로시 지하의 존재를 알지못하는 지상으로서 지상을 모르는 악으로서의 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말이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지하의 삶은 존재 하지 않은것으로서의 지하의 삶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 두그릇을 비교해 보면 언젠가 아마도 그릇은 음식을 담는것에 충실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먹고 살만하니 음식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마치 요즘 인스타에 모든 음식들이 맛으로서 평가돼어지는 것 보다 오로시 보는것이 더 이쁘고 더 아름다운 보는것에 대한 가치가 한겹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제 배고픔은 별로 없는 듯해 보인다. 아마도 배를 굶고 배고픔이 해결돼지 않았다면 우리는 저 투명한 그릇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음식이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게 대두된다면 음식 본연의 맛도 맛의 가치가 덜하지만 오히려 보여지는 음식이 중요하게 되다보니 음식의 재료도 알록달록한 색깔이 대두돼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만 그랬을까? 공간이라는 의미도 실용적인 의미에서 편안하고 살기 좋은 것보다는 아무래도 유리창문이 많아질 것이고 보는것이 중요한 경치 경관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그 중요함은 아마도 우리를 관찰자의 시점 우리의 미각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듯 보인다. 

그러다보니 내면이라는 것이 중요한 시절이 있었다. 그 내면이 이제는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시대가 된것이다. 구지 보이지 않으면 중요하게 생각이 들지 않고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나를 이롭게 하는것만이 중요하고 그러한 가치가 최고의 미덕으로 숭앙돼어지는 그러한 시대가 온것이다. 구지 보이지 않는것을 볼 필요가 없고 구지 들여다 보지도 않는 그러한 시대가 온것이다. 관심이라는 것이 오로시 관심있어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뮬로 구지 알리고 싶지도 않고 알릴 필요도 없어진 그러한 때 말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닌 구지 남을 위해 어떠한 불필요한것을 하게 되면 왜라는 말이 따라다니는 때말이다.건물의 주변에 거울의 창이 많아지고 그 창을 통해 들여다 보지 않으면 답답해 죽고마는 남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하고 단지 그 궁금함이 재미가 되는 그 근본없는 재미가 그 찰나의 재미마자도 미덕이 돼는 그러한 삶 말이다. 우리는 점점더 그리고 나아가는 것 같다. 너무 얕아서 너무 얕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너무나 깊이가 없어서 깊이를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삶말이다. 그저 한 번 웃고 지나면 그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어져 버리는 only 극도의 단순함 아니면 너무나 디테일해져서 개인이 그 개인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아주 사소함의 삶 말이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고 가는 것이 분명하다. 누구나 다 들여다봐서 너무나 투명한 반도체 clean room을 들어가는 느낌 너무나 깨끛해서 날 파리하나 없는 그러한 삶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빈부를 가르는 말중 가장 최고의 metaphor는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요즘 아이들이 자주 이야기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SMELL일것이다. 맡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인지반응으로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만약 그 냄새를 당하게 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동작은 너무도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고 생채기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냄새는 존재 차제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아주 부정적인 반응인 동시에 이 냄새는 우리의 모멸감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동작일 것이다. 인류의 후각은 기본적으로 생리적인것인 동시에 현대에 와서는 이 냄새만큼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각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가지 변천과정을 통해서 시각적인 평준화를 이루어 낸것에 비해 후각은 근본적으로 아직도 평준화 돼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주의가 어느정도의 겉모습은 모방me too를 통해서 가능해 졌지만 후각은 아직까지 돈이 더 들어간다. 일정부분 좋은 냄새를 가지기 위해서는 좋은 공간과 좋은 apperance가지기 위해서 그에 수반되는 시설물들 세탁이라든가 세탁이후 관리라든가 몸을 정기적으로 깨끛히 할 수 있는 시설물 욕실들 세안용품 거품제 좋은 냄새는 이런 facilities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옷은 가능하지만 입안의 냄새 잘관리돼어야 하는 치아관리, 피부, 헤어등 이러한 모든 관리부분이 냄새 smell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이 smell 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대면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SMELL이 대단한 컨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하실 반지하의 곰팡이 냄새등이 빈부의 하나의 컨셉으로 SMELL을 다룬것 같다. 이영화가...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SMELL이라는 용어도 상당히 미적기준 미적인 가치가 함축된 말이고 이에 반한다면 이 SMELL은 상당히 대면하기 어려운 냄새가 될것이다. 가장 자존감이 상하고 자존감을 건드리는 존재로서의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SMELL을 표현한 것 같다. 아주 상당히 공감이 가는 정교한 DETAILS라 생각한다. 영어를 왜 쓰냐고 그냥 쓰고 싶어서 마치 영어로 쓰는것이 더 잘 표현돼는 것 같아서 잉 영화가 주장하는 영어로서의 표현말이다. 

English 대한민국에서 이 단어처럼 기죽게 하는 말이 있을까? 영어라는 것 최소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나라 그러면서도 영어를 못하는 나라중에 하나 영어로 쓰이는 돈이 1년에 해외연수까정 포함하면 1조를 쓸래나 더 쓸수도 있겠다. 미국가야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어학연수에 국내 학원에서 해외에서 우리의 영어는 우리의 교육의 가장 커다란 구멍이자 커다란 국세의 배출구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면서도 영어를 썩 잘하지 않는 청담동의 식당에서 엄마가 아이와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은 실 생활에서 한두번은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토록 사대주의의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존감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걍 연수자들 영어는 여기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상류사회의 흔적으로 상류상회의 어떤 자존감을 드러내는 최고의 수단으로 한마디 english로 소화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의 언어는 stress요 money요 confidence요라고 그러나 몇년전에 그러한 공부를 밥먹듯 한 기자들이 오바마앞에서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이러한 세태를 보면 우리는 우리스스로 우리를 잃어버리고 뭔가에 그림자에 살고 있나 싶지 않다.  그림자 영어 존재도 없고 그러나 다른사람앞에서 우쭐해지는 수단으로서 영어 강한자 앞에서는 말도 한마디 못하지만 못배운 자 약한자 앞에서 하는 그 쓰레기같은 영어 말이다. 그러한 언어 걍 고급 화장대 같은 영어말이다. 거울처럼 나 자신을 비춰보지도 못하고 떡질한 나를 보고 스스로 만족해 하는 그러한 가구같은 영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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