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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Place

서울명소 [세검정]

by 링마이벨 2017.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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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이다.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세웠다. 인조 반정때, 이귀·김유 등이 이곳에 모여 해군 폐위 결의를 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이 이름이 생겼다.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1]

김류(金瑬, 1571년 ~ 1648년 3월 5일)는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순천.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아버지 김여물임진왜란 충주 탄금대 전투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이 되었다. 서인의 영수이고, 인조반정을 기여한 공로로 정사1등공신에 책록되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이·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에 삼도 소모관·삼도 선유관으로 ··식량·군졸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 군수·배천 군수 등을 지냈다. 1616년 이귀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능양군(후의 인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던 신경진과 구굉 등이 이서와 반정을 먼저 계획하였고, 이귀는 이 계획에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13일 밤 이귀는 김류, 최명길 등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후의 인조)을 추대하는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총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이귀는 일등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1]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하였으며, 이때 (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 <묵재일기> <이충정공 장소> 등이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배경[편집]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경과[편집]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정에 성공했다.

결과[편집]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때 광해군 정권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 · 정인홍 · 유희분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처형할 때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역사적 의의[편집]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인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정의 하나로 지목하여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귀, 장유, 최명길이다.

광해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인조반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카가 큰아버지를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하는 인조반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가 조금은 부족한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정권찬탈에 해당함. 정책적인 반정을 위해 많은 살인과 약탈을 이루어내고 훗날 정묘, 병자호란을 일으킨 사건의 발단이 되고 역사적인 명분이 부족한 단순목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

http://blog.joins.com/usr/c/ho/chobjay47/0901/497da7fe393b5.jpg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한 광해군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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