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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해녀

by 링마이벨 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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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제주도를 가게 돼면 우연히 해녀를 볼 수있다 . 날씨도 차가운데 잠수복과 커다란 납덩이를 허리에 차고 아마도 백발이실듯 한 걸음걸이로 바닷가로 들어가시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걸음걸이를 보면 촌로의 할머니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가파른 숨을 참으실까? 라는 생각과 더불어 이 늦은 가을날에 바닷가로 들어가는 삶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손주 용돈이 필요해서 아니면 오늘 저녁 찬까리를 위해서 뭣이든 그 발걸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삶의 수단과 목표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만 하는일 말이다. 이 간극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추구하는 바가 바로 이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보면 이미 목표는 존재하는 것이다. 간극이라고 생각하면 이 역시 위와 아래 또는 중간값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돈을 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이 교체가 되면 삶의 지향은 money gathering 으로 끊임없이 돈을 모으는 동작을 영원히 날 몰입시키는 것같다. 그렇다고 많은 축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쉼없는 반복동작에 모두 날러간다. 이웃도 사랑도 삶의 관심도 내가 맬 월급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더욱더 몰입돼고 더욱 갈증이 난다. 쓸곳은 많아지고 한정된 자원으로 wish list만 아래로 아래로 리스팅된다.

삶에서 거창함 허세를 빼놓고 만약 목표 그 모든것을 배제하고 삶만을 위해 살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온전히 삶 자체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의무도 도덕도 믿음조차도 만약 이 노래에서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wanting to be loved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reaching love
Love is asking to be loved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we can be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Love is needing to be loved

Love를 life로 대치한다면 그냥 삶 자체로 존중돼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원동력이 될수 있다면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다는 존재했었고 오늘의 나도 존재이고 물도 물속에 여러 생물도 오늘에 나와 같이 살아가는 동시다발의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없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 존재하지만 그래서 nothing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서 실은 다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해녀 어르신한테 맞을 소리겠지만 암 것도 안허고 구지 바다로 드가지 않아도 오늘 내삶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삺수 있다면 아무것도 안 허고 싶다. 그럼 소는 누가 키울겨? 그 소란 과연 내 삶에서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무엇인지 최소한 추측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찾아가며 살고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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