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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어머니

by 링마이벨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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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때 인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때 축구부를 했는데 우리 동네는 아주 자그마한 면단위 소재지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지금은 골프장과 스키장이 생겼지만 그때는 군부대가 많아서 담배소비가 많았는데 우리집은 담배와 지금으로 이해하면 CVS점에 막걸리를 취급했다. 양조장에서 차가 오면 말통으로 가져와서 항아리에 넣어주면 그 항아리를 1되 나무로만든 되박으로 1되 2되를 주전자에 넣어줘 판매를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막걸리 유통업과 담배, 일반 잡화를 취급했다. 먹을 것들 과자, 음료, 식표품등 슈퍼마켓이라고 하여간 모든것을 취급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참으로 억척스러운 삶을 살고 계셨다. 나는 맬 축구를 하고 오후에 4시에 국수와 라면을 섞은 국수라면을 학교에서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때 어머니는 고무신에 커다란 김이 오르는 큰 다라에 국수를 이고 근처 제제소에 참으로 국수를 100M 정도를 배달을 하고 계셨다. 리어커로 국수를 운반하자고 할때 먹을거라 리어커로 움직이는 걸 싫어하시다 보니 국수를 배달하는 것은 어머니가 전담하셨다. 어머니 몸보다 커보이는 국수다라를 머리에 이고 가실때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니 흡사 어머니가 화가 나셨다고 생각했고 어머니가 목욕탕을 이고 가신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우연히 어머니를 보았을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키운 자슥이 바로 나다. 지금은 이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어머니의 고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냥 신물난다. 이런 생각이 들면 여지없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 이런 지극정성을 받고 태어났는데 가끔 난 넘 철없고 어리석고 아직도 투정하는 아이같다. 

우리집은 면단위에서 유일하게 다이얼돌리는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 Gold Star tv를 보유한 집이기도 했다. 오죽했을까? 동네에 걸려오는 전화기는 아참 전화기 시스템부터 이야기 하면 전화를 수화를 담당하는 중간에 연결해주는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분에게 몇번이라고 전화를 하면 전화가 연결되는 방식인 것이다. "서울 몇번 바꿔주세여! 잠깐만이요!" 이런 방식이었는데 참으로 인간적인 전화였다. 전화가 유일하다 보니 겨울에 급한일로 전화로 우리집으로 오면 "순자 누나네 이모가 병원에서 급하게 전화왔는데, 전화바꿔 달라고 하네! " 어머니가 이러시면 그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집을 나와 양말도 안 신은채로 옷을 입고 200m 정도를 가서 "순자누나! 누나네 이모가 전화 받으라는데요!" 그러면 그 겨울에 순자누나랑 다리를 건너 우리집으로 돌아와 그 누나는 우리집 안방에서 전화를 기다리고 전화가 오면 통화를 한다. 아마도 전화를 하면 거는 사람이 요금을 내는 방식이라, 대개는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는다. 어떤 때는 급하다고 전화를 할 요량으로 전화비를 주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괜찮아여! 시급을 다투는 일인데..." 이렇게 말하시고는 전화를 쓰게 하셨다. 아마도 나의 이런 선행을 하늘님은 알랑가?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인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배포가 대단하셨다. 그 없는 살림에도 필요하다 싶을때는 동네일에 쾌척을 하셨다. 장사가 잘돼던 터라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네들 집으로 들여서 막걸리 한잔에 노가리 안주를 내놓기도 하셨고 이북사람들 가진 억척스러움과 배포를 함께 지니고 계셨다. 참으로 내가 어머니에게 받고 싶은 많은 것중 하나인데 잘 못받은 것 같다. 

우리집 color tv 이야기도 했는데 tv가 2개 정도 있었는데 삼판일 하시는 아저씨랑 우리집 2집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집tv는 누나가 동네에 근무하는 대위 아저씨랑 결혼하면서 매형이 사다준 빨간금성tv였다. 썩 크지도 않았는데 국민학교 시절 아마도 토요명화, 전설의 고향 2가지 콘텐츠는 넘 거부하기 어려운 콘텐츠 였다. 토요명화 9시 35분인가 저녁에 하는데 광고 어머어마하게 많아서 그 광고 보다가 잠든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좀 늦다보니 대개는 이불에 들어가 보다보니 잠을 많이 자게 되었고 star wars, 석양의 무법자, 전투 아 이런 영화들은 진짜 몇일전부터 기다려 진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그때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저녁 8시인가? 아마도 조금은 이른 시간에 하다보니 여름에 납량특집으로 했었는데 가마니를 깔아놓고 그 가마니에서 동네 어르신네들이 여름에 부채를 부치면서 '전설의 고향'을 같이 시청했다. 난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지금도 영화를 볼때 그런 생각이 나곤한다. 극장이 읍네 나가야 있다보니 전국 유랑극장이 있었다. 초등하교 2-3학년 큰 나무 기둥을 세우고 하얀 천막으로 주변을 둘러치고는 영사기로 하얀천에 투사해 영화를 상영했다. 그게 '엄마없는 하늘아래' '얄개시대' 이런 영화였다. 다 잃어버린 과거라 생각했는데 참 기억력이란 어마무시하게 무섭다. 아직도 한번도 이야기 해본적도 생각해본적도 없는데 갑자기 이글을 쓰면서 여러가지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난다. 난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아마도 내 동년배들은 웃을 수도 있다. "진짜로 에이 거짓말이라고..." ㅋㅎ 하지만 사실인걸 어쩌랴 ! 앗 참 우리 엄마 이야기 하다가 샛네여! 

아까 내가 국민학교 때 축구선수라 이야기 했는데 난 5학년 때 인가! 어머니가 축구부를 그만두고 이제는 공부를 하라고 하셔서 억지로 축구부를 그만두었을때였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 조폭도 아니었는데 축구부를 그만둘때 선생이 안된다고 이야기 하셔서 학교에 어머니가 오게 되었다. 2층에서 어머니를 내려다 보았는데 흰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았는데 멀리서도 엄마가 넘 걱정된 빛을 하고 오셨고 손에는 두툼한 수건에 무언가를 넣으시고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잠시후에 축구부 선생님이 오시더니 교무실로 불렀고 갔더니만 책상위에는 거북선 1보루가 놓여져 있었고 그당시 가장 비싼 담배였다. 봉담배, 환희, 아리랑인가? 선생님은 "진짜 축구부 그만둘거냐?" 예라고 대답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자 마자, 선생님은 일로 와바! 하고는 조폭도 아닌데 마대자루로 20대 엉덩이를 맞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개새끼 였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정확한 답을 알기 어렵지만 그 당시 운동선수는 그 꼴리는 대로 했다. 미친놈 최** 살면서 그렇게 엉덩이를 아프게 맞아봤던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이다. 하여간 그 삶 이후로 엉덩이 맞는게 무섭지 않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때렸을까? 애들을 이유도 없이 즈 기분 안좋다고 이런 폭력의 시대가 있었다고 하는게 지금 애들은 이해도 못할 것이다. 저녁에 갔는데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맞았냐? 엉덩이를 보시면서 얼마나 울어 주셨는지 잘 안우는 분이셨는데 말수도 적으셨는데 "나쁜 선생님이구나!"  이 한마디 하시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왜 그렇게 우셨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데 진짜 나이가 들면서 많은 걸 알게 된다. 가끔 우리가 이해 한다는 말이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얼마나 가벼워 지는지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 생각이 든다. 나의 엄마는 커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어떤 비바람도 폭풍우도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내가 중학교때 부터 외지생활을 해올때 참으로 여러번 많은 기회들이 나를 망가뜨릴 수 있었는데 나는 참으로 잘 큰거라 생각한다. 어머니 덕택이다. 그 거대한 산 가끔 우리 엄마는 말 벙어리신가? 생각도 하기도 했지만 거대한 산이셨다. 나의 폭풍우와 바람을 막아주셨던 그 거대한 산이 그 거대한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 나를 못 알아보신다. 가슴이 쓰리다. 엄마 모시고 제주도 한번 모시고 가야 하는데 말이다. 제주도 가 바다바람 쐬이시고 엄마 좋아하는 회 한접시 사다 드리고 싶은데 움직이지를 못하신다. ㅆㅂ 엿같다. 난 바보처럼 

어머니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온다. 많은 말을 이야기하지만 잘 못알아 드신다. 복날 술 쳐먹고 동네에서 트럭밑에서 자기도 하고, 당구장에서 터미널에서 싸우다가 군기교육대 가고 시동에서 싸워 코뼈를 부러 뜨린 애 아버지에게 서너시간 같이 무릎 꿇고 사죄하시다가 같이 걸어 내려오는 언덕길에 가을 달이 얼마나 동그랗고 예쁘게 떠 있었는데 멀찌감치 앞으로 가시며 뒤로 돌아보시지 않고 걸으시던 나의 어머니 그 빠른 걸음을 걷던 우리 엄마가 걷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계십니다. 그 좋아하는 막내아들도 못 알아보시고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무섭습니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려 하는데ㅗ도 언뜻 언뜻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침에 어머니 보려고 가다가 문득 아침 새벽에 일어나 멍하니 있다가 우리 흔적들을 찾아봅니다. 나의 흔적과 내 어머니가 나에게 전해준 그 많은 사랑들을 하나 적어 보았습니다. 난 어머니의 막내 아들 입니다. 사랑합니다. 조자 봉자 순자님 나의 엄마 조자 봉자 순자 엄마 조봉순 엄마 엄마 사랑합니다.  사라진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막내 아들이 이렇게 많이 늙었습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막내한테는 너무 일찍 객지생활을 하게 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가슴 쓰리다고 이야기 하신 나의 어머니 그렇게 생각안하셔도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꿋꿋하고 건강하게 잘 컸기 때문입니다. 엄마나 따스하게 잘 챙기셔여! 애 간장이 탄다라는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의미인지 조금ㅆ 조금ㅆ 느껴집니다. 평생 애간장 타면서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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