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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가족

by 링마이벨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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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추석을 마치고 아버지 성묘를 다녀왔다. 이제는 사유지라고 있는 길을 막으며 가지 말라고 하는 땅임자가 있어 모멸스럽지만 뒤로 한참을 돌아서서 아버지 묘에 술 몇잔을 붓고 너무나도 많은 기원을 쏟아붓고 막 돌아왔다. 1972년 겨울에 돌아가셨으니 햇수로 50년이 넘었다.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나 기억도 많지 않다. 그저 상이 치러지던 날 너무나 어렸기에 내가 가졌던 기억 몇개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워낙 가족이 많았던 터라 흑백사진에서 보았던 집안의  단체 사진을 보면 저렇게 많은 형제를 맏 며느리로 형제들의 뒤치닥거리와 매 끼니를 준비하랴! 아주 가끔 딸만 낳으셔서 갖은 시집살이를 하며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른다. 지금 그 어머니가 병원에서 장염으로 입원하셨는데 많이 힘들어 하시고 있다. 빨리 회복을 했으면 내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겨울에도 여름에도 신고 다니셨다. 우리집은 마을 제제소가 있었던 동네 가운데 담배, 식료품, 과자, 술, 막걸리 모든 것을 파는 잡화를 다루었고 어머니는 마을 제제소 인부들 점심과 오후4시 참을 준비하였다. 참은 주로 국수를 끓였고 가끔은 라면을 끓여서 뜨거운 국수다라를 이고 제제소로 고무신을 신고 이고 가셨다. 겨울에도 미끄러지지 않으실까? 조마조마하지만 항상 흔들림없이 참을 준비하였다. 어머니는 황해도 연백이라는 지방에 나셔서 1930년대 말 서당선생님이신 아버지를 따라 일본의 창시개명때 만주로 피난을 갔다 다시 내려오셔서 터를 잡은 곳이 강원도 인제 땅이셨다. 아마도 거기서 중매로 강원도 홍천남자와 결혼을 하셨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나는 이제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가 든것같다. 지금같으면 병도 안돼는 위궤양이 그때는 손도 못쓰고 원주 기독교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하셨다 집에 돌아오셔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때 살림이 있었던 전답을 팔다보니 동네사람에게 또는 쫌 먼 친척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세가 많이 기울다 보니 어머니 혼자서 이것 저것 안하신게 없다고 한다. 가족은 어떤 인연으로 어떤 의무감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을 살면서 의리도 혈연도 어떤 도덕적 신념도 가족의 가치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이건 평생의 의무와 평생의 책임감 가끔은 태산을 넘길 만큼의 부담도 있고 피눈물 같은 고통도 동반한다. 

나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다. 아마도 내가 어머니에게서 배운 삶의 중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보여준 그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것때문이었다. 살면서 어찌 좋은날만 있으랴? 요즘 이래 저래 어려운 일이 닥쳐올때 아버지라면 어머니라면 어떻게 이 난국을 해체나가 셨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유독 나에게만 힘들고 어려운 시기로 보이는 때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그 답답함과 그 답없음을 어떻게 침묵으로 한발 한발 내 디녔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침묵의 한걸음 한걸음 그 거침없음이 바로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돼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위궤양으로 세상을 등지고 먼저 가지 말아야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서 아이들에게 아버지란 이름을 오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가 먼저 였고 어머니에게 효도가 두번째인데, 어리버리 하고 있다. 우리집은 2남 4녀 그중 나는 막내이다. 어머니의 품을 일찍 나와 중3년 때부터 지금까지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군복무를 빼고 나면 줄곧 밖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혼자 밥해 먹고 혼자 모든 기거를 해결하는 자취를 해온 셈이다. 그러다 결혼후에 아들과 딸 2자녀를 두고 있다. 요즘 좋은아버지와 좋은 남편이 돼지 못한 것에 취조를 당하고 있다. 사느라 열심히 살아왔는데 많이 아쉽다. 너무 사람하는데 과잉보호라 하고 아내에게는 무관심한 남편이라 한다. 어디에소 잘 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살아온 시간은 어느 시간에 넘 정직하게 잘 살아왔는데 그것을 너무나 건성이라고 칭한다. 나는 넘 서운하고 아쉽지만 구지 그러한 평가에 연연해 하지도 않는다. 나는 삶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어머니가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어도 한발 한발 앞으로 잘 내디녔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단 말이다. 

가끔은 왜 저렇게 어렵게 사실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 후회스럽지도 않고 서운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수많은 이땅의 아버지들에게 박수를 치고 싶은 추석이다. 할일도 쓸일도 많은 추석이라 머리속은 온통 많은 생각으로 뒤섞이지만 추석달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하고 행복하기를 스스로 주문을 외워본다. 어머니가 걸어온 길처럼 힘들지만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을 생각해본다. 참으로 꼿꼿하게 주위의 존경과 싫은 소리 함 안들으시면 자신에 대해 얼음처럼 차가우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나의 신앙이다. 지금 그 본체가 쫌 아파하신다. 연로하시지만 그래도 자꾸 욕심이 생긴다. 더 건강하시고 더 행복하시기를 기원하며 욕심을 부려본다. 아마 나의 욕심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화답하시고 건강한 삶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나는 여직 세상에 대해 누구에 대해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나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기울이며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누군가 어떤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있다면 나의 소리에 귀기울여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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