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eartbroken

마스크

by 링마이벨 2021. 1. 2.
반응형

코로나 겪으면서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경험을 한다. 처음에는 너무 불편해서 단 몇분을 착용을 하고 몇분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생활속에서 불편함을 지속하기란 매시간 매분 내 입과 코의 호흡기를 가린채로 생활하기란 내 입과코를 손으로 막고 숨쉬는 거라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마도 나는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산소가 맘대로 나의 폐속으로 들어오고 쉽게 내 뱉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을 blocking 당하며 시시각각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응한다. 인류가 불에 적응하고 전쟁에 적응하고 부조리에 적응하듯 도심의 안개와 폐허 공해 외로움에 적응하는 것처럼 이 숨막히는 환경에 철저히 아주 정교하게 적응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불이 육식을 권장하듯 이 코로나는 이 마스크는 우리에게 폐쇄적인 공간이 주는 답답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줄것이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사회라 일컫는 모든 기본적인 과정들을 모두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Social이라는 말에 대한 Society에 대한 그동안의 정의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 통제의 요인들을 어떻게 기계가 통제할 수 있는지를 Telecom이 어떻게 인간을 제어하고 인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newnormal이라는 용어로 새롭게 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의 그 넓을 땅에 국가적 영역을 생성하듯이,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토지에 대해서 소유권을 처음 규정하던 그때처럼 우리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로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들이 아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뽕나무 밭이 바다가 돼었다"라는 말이 오히려 그 상황에 적합해 보인다. "새롭다라는 말은 어찌 생각해 보면 두렵다. 불편하다"라는 말로 대치 될 수 있다고 본다. 생소함은 인류에게 두려움을 주고 저항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돼는데 천재지변으로 인한 변화앞에서는 무용의 말처럼 생각된다. 불편하고 환경에 저항하는 것들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변화가 완료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완료된 상태이고 이미 요람에서 임종을 맞은 것이다. 아동기와 청춘기 노년기가 사라지다 보니 그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두려운 것들이 있다. 사람이 없어지고 시간이 없어지고 결과만 남게 되고 사람들이 사라지고 기계가 시스템이 그 모든 공백을 채우게 된 것이다. 앞으로 사람이 했던 영역들 그 역사적인 반복과정에서 사람들은 한번에 Delete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환경에 철저히 적응하는지는 요즘에 나를 보면 알 수있다. 마스크가 조금씩 조금씩 편하게 느껴진다. 생활 속으로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 있고 가끔은 혼자 차를 운전할 때도 잊어버리고 마스크를 쓰고 운전을 하기도 가족들과 이야기 할때도 불편하지 않게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할때도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완벽하게 적응했는지 나도 모를 지경이다. 편함에 적응하는 것보다 불편함에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더 완벽하게 적응하는지 모를 것이다. 배고픔은 포만감이랑 다르지만 동일한 2개의 결핍증상이라 생각한다. 포만감은 장기는 충만한데 뇌가 배고프다고 신호를 주는 것이고 포만감은 먹지않아도 뇌가 배부르다 인지하는 2개의 인식오류인것이다. 우리의 불편함을 뇌가 평상시로 인식하고 우리는 불편함마저도 날이 갈수록 편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물속을 걸어가도 궁핍마저도 불편함마저도 편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만간 산소호흡기를 짊어지고 살아도 머리에 또하나의 머리를 짊어지고 살아도 습관화 돼면 어떤 불편도 심지어 자유를 제한하고 감옥에 있다고 한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적응이란 끝이 없는 듯 하다. 

개인적 경험이긴 하지만 여름에 긴 소매를 입고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체로 지하철에 앉아있는 중년의 신사를 본적이 있다.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그 중년의 신사는 땀을 흘리며 있었다. 나는 습관의 무서움을 그때 보았다. 직장이라는 Doing의 상태 그는 지금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것으로 집중이란 얼마나 몰입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인식의 도구인지 모르겠다. 법률, 정치, 종교, 이데올르기로 인류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그 잔인한 폭력의 역사마저도 오늘의 마스크처럼 입닫고 숨 못쉬게 만든것은 아닌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불편함은 그저 하나의 구실로 여겨진다. 나는 이 유무형의 억압적인 환경에서 인간을 더욱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습관으로 보인다. 습관은 약물보다 더 중독적이고 종교보다도 더 치명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 습관은 반복의 문제이고 매일매일의 문제인것이다. 습관은 편의적이고 일상으로 사고를 줄이고 무의식적으로 하게 한다. 구두 장인에게 있어 손이 기억하고 우리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올때 가끔은 머리아픈 일이 있을때 무의식적으로 들어와 보니 집에 도착하였고 가끔 생각해 보면 중간과정이 잘 생각이 안 나는 것처럼 그리고 술취한후 집으로 택시를 타고 돌아오거나 택시를 타고 왔을때 그 중간과정이 생각안나는 것처럼 우리가 "필름이 끊겼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철저히 중독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결국 그 반복의 문제는 편리한 만큼 우리에게 병폐를 가져다 준다. 그럼 매일 매일을 각성하듯이 하루 하루를 의식적으로 사는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너무 피곤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마스크를 쓰는것이 편하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코로나19는 감소하겠지! 백신이나 치료제처럼 즉각적이고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 불편함이 갑자기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몇자 적어봤다. 두서도 없고 그런데 글을 쓰고 싶어서 써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