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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by 링마이벨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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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좌우는 생명의 삶의 선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선택은 몹시 모질고 냉혹해질 정도로 빠르고 강했던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 가족의 운명을 한 순간에 정했던 것이다. 일전에 모 전자회사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유달리 많았던 전쟁을 통해서 변방의 많은 이민족 사이에서 또 살기위해서 민족과 민족의 전쟁이 빈번했던 동북아 또는 해양민족의 디딤돌 지역에서 유달리 선택은 모든 삶의 시작이자 잠깐 정신을 놓으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강물처럼 떠다니며 살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삶의 굴곡에서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에게 공격성이 없음을 반항이 없음을 보여줄 수 있는 표현방법은 동조와 공감 뿐이었던 것이다. 6.25가 우리에게 준것은 이 참혹한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이 중국이 러시아가 그러했조  UN이 그러했고 일제강정기에 누구보다도 우리의 이러한 불안심리를 통해서 '피의 통치'를 수행한 모든 민족간의 분열을 야기시켰고 36년이라 하지만 실제로 1875년 시작이라고 본다면 일본은 70년 가까이 통치를 한 것이다. 일본이 통치를 지겹게 견디어 온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그 이후 100년 지금까지고 그 분열의 통과의례를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듯 하다. 

진보와 보수라 포장해주는 신문이 고맙기도 하지만 철저히 그 분열을 노리고 그 분열의 시세차익을 누리는 것도 언론이라고 본다. 언론은 미디어의 행태로 보면 이미 고배를 마시고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여 시대에 뒤떨어져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국민이 그 신문의 대변역할이 아직도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댓글조차도 존재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댓글은 좌우에 대한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하면서 그들의 생명연장을 이루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첫째 광고수입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언론이 가지고 있던 일제 강정기 그들의 뻘짓을 아직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은 기업들로 하여금 아직도 신문의 광고, 신문을 PR, 또는 홍보매체로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고로 현재의 신문의 생명연장은 기업이 해주는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이 기자와 점심자리가 많고 그들의 눈치를 보고있고 그들의 TEXT  라는 살인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댓글을 통해 보면 아직도 우리는 이 좌우에 너무 민감한 수준이고 민감을 뛰어 넘어 돈을 주고 그 감옥에서 항상 빠져 나오려고 하는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검찰이 그러하듯 검찰과 언론은 삶의 방식이 너무 비슷하다. 갑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끊임없이 기득권과 무병장수를 꿈꾸다 보니 속으로는 썩어서 문드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배를 타다보니 이제는 손발이 척척 맞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민도 없다. 국가도 없다.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은 가족의 안위뿐이다. IF 내 가족만 지킬 수 있다면 IF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에 집중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 그것을 잃지 않으려면 가문을 가족을 내 아들과 딸이다 보니 이러한 정신적인 가치를 철저히 이용한 것이 일제 강정기이고 그 강정기를 움직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쪽바리 보다는 우리의 민족 우리의 형제 우리의 부모 동생이었던 우리의 민족 우리 출신의 '밀정' 이었던 것이다. 철저히 짓밟혀지고 나라를 판 귀족, 그나라의 산과 들을 얻는 대신에 조국을 팔고 왕을 모살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받고 가족들을 모아 일본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던 시기 대다수 국민이 가난에서 고통받을 때 귀족을 작위받고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일본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사람들 그 나라 그 토대위에서 지어진 나라여서 유달리 그 기득권은 아마도 양보할 수 없는 죽음과 맞바꿘 열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물림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식이라고 생각하니 그 자식에 대해서 불법도 부정도 불사하여야 할 통과해야 할 필수장애물인 것이다. 

보기보다 좌우, 보수와 진보는 아주 정교하게 또는 아주 절실할 수 밖에 없는 마지막 보루인것이다. 사실 보수는 기득권이도 진보는 진보대로 그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인 동시에 나도 그 기득권을 누려보려는 심리가 근저에 배어 있어 보인다. 한번 보자!        

 냉정하게 이야기 해 보자! 만약 젊은 시절에 여기서 고문을 받았던 사람, 여기서 고문을 한 주체는 대개 일제강정기에 고문을 배웠고 동포를 팔아서 자기는 고문을 피했고 독립이 돼고 미국이 다시 들어와 그 고문했던 당사자가 경찰 고위 간부가돼어 또다른 고문기술자를  고용해 많은 대학생 인권운동 노조 국가에 대항했던 것으로 많은 정의를 짓밟아 왔다. 죽음까지도 간 경우도 많았고 그 사회적 휴유증이 지금껏 유지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문을 했던 사람이 끊임없이 기득권이 돼어왔고 대통령이 몇번 바뀌어도 지금까지 여기서 고문당했던 사람들 그 주변의 사람들이 이제는 대통령이 돼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이 좌우에 끊임없이 부합하지 않고 정부와 권력과 그 부조리를 공유했던 사람은 누구였었을까? 바로 언론이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때로는 주변인으로 아주 한때 피해를 보는 당사자 처럼 행동했지만 그것도 아주잠깐 양심적 언론인이 존재했던 아주 그 촌음을 제외하고 언론은 끊임없이 일제강제기를, 검찰을, 한때는 경찰을, 지금은 특정당과 특정 정치인을 편들으며 패러다임을 만들고 울타리를 만들어 싸움을 조장하고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돈을 버는 기묘한 삶의 생존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는 그 모든 패러다임이 기업으로 MONEY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을 버는 방식이 권력에 가장 가까이에서 신문이라는 카테고리를 생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기업의 생존방식에서 보면 언론이라는 부분이 논조나 미디어 플랫폼으로 정교해지면서 사실은 그 콘텐츠에 투자하고 콘텐츠의 질을 어떻게 상승시키냐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 고민을 자극적이고 서로 싸우게 하고 있지도 않은 울타리를 필요없는 울타리를 성처럼 높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불필요한 갈등의 성벽을 치울수 있고 현상을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국민들 스스로인데 그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하고 못듣게 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기사를 몇달째 해가 바뀌어도 쓸 수 있는 사람들 철지난 것을 들고 나와 사화와 당쟁을 만드는 사람들 가뜩이나 역사적 경험들로 그 부정과 그 부패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더러운 방에서 냄새나고 곰팡이 가득한 방에서 아편을 넣어서 국민을 마치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호도하고 혼동스럽게 만드는 사람들 이땅이 아직도 전쟁후 6.25후 거제도 수용서처럼 지리산 빨치산의 전라도 어느 지역처럼 아직도 피비린내 나게 하고 그 피비린내에서 그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오늘도 말로 이 통곡의 산과들을 오염시키는 것 그 중지할 수 없는 이간질 아마도 멈춰지지 않겠지만 그 걸음을 누가 멈출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누가 이 비를 멈춰 줄 것인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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