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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Place

문화재리스트 로맨틱한 서울(석파정)

by 링마이벨 2017.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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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 서울미술관 

       석파정은 조선시대 정자로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 대한제국 고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정자앞의 산이 모두 돌이어서 석파라고 칭하였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미술관입장(9000원)후 미술관 3층을 통해서 입장이 가능 
      

                         

석파정은 조선말기 문신 김흥근의 ㅂ

김흥근(金興根, 1796년 ~ 1870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안동.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游觀)이다. 이조참판 김명순(明淳)의 셋째 아들이며 영의정 김홍근의 동생이다. 예조판서,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지내고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

1825년(순조 25) 공자묘 앞에서 주관하는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이조참의, 검교대교를 지냈고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전교관이 되고,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대사헌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고,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여러번 지냈고 이후 다시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헌종 즉위 후 35년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여러번 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철종 즉위후, 1851년 풀려났으며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1852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별장을 탐냈던 흥선군이 대원군이 된 후, 별장을 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자,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데리고 그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한다. 임금이 머문 곳을 사저로 쓸 수 없다는 사회통념 때문에 김흥근은 별장을 흥선대원군에게 헌납하였다. 김흥근의 별장을 반강제로 압수한 흥선대원군은 별장이름을 석파정이라 바꾸고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1][2]

알성 문과
(謁聖文科)
[역사]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이던 문과

별장을 강제적으로 흥선대원군이 무단 1회 사용후 빼앗아 버린것이네 ...나쁜사람 이하응 아저씨 자기가 빼았아 억지로 쓴거네...

석파정이 위치한 자하문 밖은 조선시대에도 산수가 좋기로 유명해 시인 묵객들이 놀러와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현 석파정이 있던 자리는 18세기 에도 이미 별장지대로 이용되고 있었다. 별서의 사랑채 앞 개울 위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巢水雲簾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是 辛丑歲也”(물이 깃들고 구름이 드리우는 암자, 한수옹이 친구 정이에게 1721년에 써 주다) 한수옹(寒水翁)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고, 정이(定而)는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니, 권상하가 조정만의 별서에 들려 써준 듯하다. 몇십년 뒤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이 이최중(李最中, 1715-1784)의 행장을 지을 때에도 “삼계동 소운암은 지역이 깊고 외져 소나무와 바위, 시냇물이 아름다웠는데, 이공이 이곳의 그윽하고 고요함을 사랑하여 항상 머물렀다”(三溪巢雲菴地深僻 有松石溪澗之勝 公愛其幽靜 恒居焉)고 하였다.

물좋고 산좋은 정자흘 이하응이 한번 들렀다가 산수에 반해 정자를 빼았은 것이니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곳에 이제는 미술관이다 결혼식장이다 두르고 덧칠해 후세에 쓰고있으니 이또한 조상을 가진 후세로 이자리에 축하할 만한 일을 하고 있으니 썩 나쁘지 않은 일이로다. 석파의 의미로도 나쁠것은 없을듯 하다. 이자리에 나도 죽치고 앉아 조만간 좋은 일을 생각해 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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